사람은 어쩔 수 없이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주변 환경은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니 나는 환경이 변할 때마다 어떻게든 조금씩 변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청소년기에는 자기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은 만큼 환경에 따라 조금 더 빨리 변하고, 어른이 되면 조금 천천히 변하는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생각해보니 10년 전의 내 모습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때는 사람을 더 많이 믿었고, 구름과 노래를 더 많이 사랑했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사소한 얘기에도 더 많이 웃었습니다. 그때 내 소원은 유안진 시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에 나오는 얘기처럼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생긴다면 ‘눈 오는 밤에 고무신을 끌고 가거나 허물없이 남의 흉을 보고도 말이 날까 걱정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알게 된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전보다 큰 소리로 웃는 기회가 줄어들었고, 혼자 있는 시간이나 노래 부를 시간은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이면도 생각하게 됐고, 일주일 동안 구름을 한 번도 쳐다보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예전에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기 위해 ‘하루가 30시간이라면’ 하고 바랐었다면 지금은 밀린 일들을 처리할 시간을 벌기 위해 하루가 30시간 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마음을 쉴 수 있는 책 속의 한 줄을 음미하기 위해 책을 찾았다면 지금은 지식을 위해 책을 찾습니다. 예전에는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써 놓고 감동했다면 지금은 다른 사람이 쓴 시 한 줄에서도 낱낱이 의미를 찾으며 평가하게 됩니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 같은 사람인데 예전의 나는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요. 내가 어릴 때 엄마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을 자주 하셨는데 사람들은 지금 내게서 보이는 ‘하나’로 나를 모두 평가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블랑쇼는 그의 책 <카오스의 글쓰기>에서 모든 사람은 그 안에 어린아이를 갖고 있는데 그 어린아이는 완전히 죽을 수 없고, 완전히 죽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한 어린아이’는 “자신이 받아들인 질서에 따라 자기로부터 돌아선 채로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말을 거칠게 해석해서 모든 사람은 사회 속에 살아가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자기 안에 있는 순수함을 감추게 된다는 말로 해석합니다.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어른들은 내 안에 있는 순수함을 드러내지 못하고, 동심이 살아나려고 할 때마다 어른은 그러면 안 된다며 자꾸 내 안에 있는 어린아이를 죽이곤 하니까요.
오늘 문득, 당신을 보다가 예전 내 모습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내가 어른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예전처럼 별을 보면 별자리의 전설을 떠올리고, 비가 오면 맨발로 비를 맞으며 거리를 걷고, 아이처럼 깔깔대고, 눈에 보이는 대로 믿으면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철딱서니 없는 내 모습도 흉보지 않는다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