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매번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리는 고은 선생님이 살던 안성대림동산 내 자택에 다녀왔습니다. 고은 선생님이 수원으로 이사를 가면서 30여년 생활해 왔던 안성 자택은 현재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안성과 평택에서 활동하는 문인들이 뜻을 모아 선생님의 발자취를 기리고 문학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고은문학연구소’를 설립했고 그날은 선생님의 자택에서 진행되는 ‘만인보아카데미’ 개강식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몇 해 전 겨울, 몇몇 시인들과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리며 문단의 큰 어르신 앞에서 참 많이 떨었던 기억이 있는데 꽃피는 봄에 다시 찾아간 그곳은 겨울과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져있더군요.
개강 시간이 가까워지자 전국에서 시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고은문학연구소장을 맡은 김완하 시인과 정진규 시인, 그날 강의를 맡은 유안진 시인 등 지면에서만 보던 낯익은 얼굴도 보였고 평택문인협회 회원들의 반가운 얼굴도 많이 보였습니다.
시인으로 생활한지 57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를 아무렇지 않게 내보이고 그동안 낸 시집이 하도 많아 그저 ‘시집 여럿’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고은 선생님은 그날 강의에서 ‘내 운명의 장소’라는 내용으로 안성 자택에서 살게 된 내력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선생님이 안성장을 떠올리며 이름을 잊어버리고 살던 아낙들이 그곳에서는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 ‘00야’ 하며 잊고 있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존재를 찾는다고 말하자 사람들 모두 얼굴에 미소를 머금기도 했습니다.
안성에 포도가 많아진 이유가 선교사들로부터 이뤄진 것이라는 말, 전화가 없어 멀리까지 나가 원고 청탁과 관련한 전화를 해야 했고 안성 토박이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습니다. 고은 선생님은 어느 날 한 지인이 전화로 “내가 안성이라는 지역을 다녀왔는데 고은 선생을 위해 하나님이 내려주신 곳을 보았다”는 말에 감동을 받아 그 좋은 조건들을 다 물리치고 덜컥 안성으로 내려왔다는 말로 안성과의 인연을 들려주었습니다.
고은 선생님은 줄곧 웃으며 이야기하셨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이분을 뵙는 것이 마지막이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더 애틋한 시선으로 그분의 모습을 훔쳐보다 눈물이 핑 돌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들려준 말 중 이 대목에서는 마치 내게 깨달음이 오는 것처럼 정수리가 시리기도 했습니다. “오늘 진리라고 믿는 것들이 내일의 진리가 되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맛있게 지은 밥이 내일까지 두면 변질돼서 개도 먹지 못하는 음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나는 다만 변한다는 진리를 믿습니다”
커다란 목련꽃 그늘 아래서 마이크를 잡은 고은 선생님의 주변으로 흰 나비가 날아다니고 의자가 놓인 마당 한 쪽에는 박태기 꽃이 하나 가득 피어 있는 아름다운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는 봄날 오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