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한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학년과 고학년으로 나눠 진행한 수업이었지만 유치부 아이들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로 구성된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친다는 것은 정말 막막한 일이었습니다. 나 스스로도 아직 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시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하는 고민이 오래 이어졌습니다.
저학년 아이들에게는 하나의 단어를 떠올려 이미지화 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 발표하는 식으로 진행했지만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기도 한 고학년 아이들은 더욱 고민이 클 수밖에요. 수업을 거부하는 녀석들을 억지로 앉혀놓고 진행한 수업은 내게도 큰 어려움이었음을 고백해야겠습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내가 아이들에게 전한 말은 “시는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니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진짜 내 마음을 마음껏 글로 적어보자”였습니다. 욕을 써도 되느냐는 질문에 그것도 좋다고 허락했습니다. 발표는 안하겠다는 요구에 그 또한 승낙했습니다. 다만 제목을 적고 선생님에게는 보여줘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뒤따랐습니다.
시도는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어떤 아이는 친구와 선생님으로부터 자신이 오해를 받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적었고, 어떤 아이는 자신의 꿈은 요리사인데 부모님의 꿈과 맞지 않아 힘들고 답답하다는 내용을 적었습니다. 또 어떤 아이는 자신이 왜 이렇게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독 내 마음을 끌었던 글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즐거웠는데 왜 갑자기 슬퍼지는지 모르겠다. 그 이유를 알고 싶다”라는 내용의 글로 제목은 ‘알 수 없는 마음’ 이었습니다.
단순히 아이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단순한 내용을 적으려니 했던 내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아이들은 그 세계에서 나름대로 심각하게 고민하며 지내고 있었고 시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기회가 생기자 자기도 모르게 슬퍼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들은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한 어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내밀하게 들여다보고 그 상처에 대한 치유가 끝나야 비로소 타인이나 더 큰 세계를 향해 마음을 여는 시를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선생님에게는 보여주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아이들의 글을 읽으며 시라는 형식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저 ‘그랬구나. 그래서 힘들었구나’하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 몇몇이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쉽게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 그 이야기에 공감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았던 걸까요.
나는 그동안 세상 살아가는 일이 그저 막연히 어른들만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 이순간도 가까이 있는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길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내가 시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가슴깊이 행복했습니다. 그날 나는 시를 통해 세상에서 가장 투명하고 진솔한 마음들을 가까이에서 만나 교감할 수 있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