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책 몇 권 정도 읽으세요?”
이런 류의 질문에 명쾌하게 답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자발적 독서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나의 대답은 늘 보잘것없었으므로, 아무렇지 않은 듯 시크하게 "한 100권쯤 읽습니다."라고 시원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을 꿈꿨다. 막연하게.
우연히 시작한 '지하철 책 읽기'로 독서량이 차츰 늘어가던 2018년, 처음 그런 생각을 했다. '1년에 몇 권 읽는지 한번 세어봐야겠다'라고 말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책을 읽으며 산 적이 없었다는 것은 몸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수치로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책 한 권을 다 읽을 때마다 '플라이북'이라는 스마트폰 앱에다 기록을 남겼다. 글을 쓰거나 그랬던 건 아니고 그냥 몇 월 며칠 어떤 책을 읽었다고 등록해 두는 정도를 했다. 1년이 지나고 보니 총 30권이 저장됐다.
1년에 3권도 안 읽을 때가 있었는데 30권이라니. 성인이 되어 이룬 그 어떤 성취보다도 뿌듯했다. 하지만 '이만하면 되었다'는 만족감도 잠시. 이내 욕심이 났다. 목표를 40권으로 설정하고 2019년의 독서를 시작했다.
34권을 읽었다. 전년도 보다 많이 읽었지만 목표 달성은 실패였다. '40권은 아직 무리인가?' 하며 눈높이를 낮췄다. 2020년의 목표는 35권. 육아휴직을 했는데 마침 코로나 사태가 터져 힘든 나날을 보냈다. 스무 권 정도를 겨우 읽었다.
2021년이 됐다. ‘복직하면 더 많이 읽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몰라 목표를 다시 낮게 잡았다. 목표량을 채우지 못한 데서 오는 아쉬운 감정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았다. 32권을 읽었다. 2권 초과 달성이었다.
2022년 초, 어김없이 엄지손가락을 움직여 스마트폰 앱에 독서 목표를 입력하려다 멈칫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현타가 왔다. 책 읽는 것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양을 늘리는 데 급급해하는 내 모습이 그제야 보였다.
‘숫자에 얽매이지 말자’ 생각하며 목표치를 아예 낮춰 잡았다.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그리고 그냥 맘 편히 읽었다. 책을 읽고 글 쓰는 시간도 여유 있게 가져보자 생각했다.
올해는 독서 목표를 아예 정하지 않았다. 읽은 책 등록하는 것도 7월쯤부터 그만두었다. 1년에 몇 권을 읽든,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숫자로부터 해방되니 책을 읽을 때 조급해하지 않게 됐다. 한 권을 아직 다 못 읽었어도 다른 책에 관심이 생기면 편하게 손을 뻗어 기웃거릴 수도 있었다. 독서량을 '권 수'로 따지는 일은 이제 그만하자고 다짐했다.
얼마 전 가수 장기하 님의 책을 보다가 멋진 표현을 발견했다.
'상관없는 거 아닌가?'라는 말이었다.
나는 책을 잘 못 읽는다. 일단 속도가 아주 느리다 (중략) 따라서 당연히 많은 책을 읽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읽은 책들의 내용만은 정확히 기억하는 편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중략)
반면, “책을 좋아하시죠?”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 편이다. (중략) 물론 시원스레 “네”라고 대답하는 일은 잘 없다. 질문을 받는 순간 뭔가 켕기기 시작한다. 나처럼 책을 잘 못 읽는 사람이 책을 좋아한다고, 그것도 매체에 소개되는 인터뷰를 통해 말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중략)
사실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최근에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중략) 인터뷰를 할 때뿐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나는 책을 좋아하는가?' 하고 물을 때에도 선뜻 그렇다고 답하지 못했었다. 왠지 책을 집중해서 죽 읽어나간 후에 누가 물어도 책의 내용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그래! 나는 책을 좋아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상관없는 거 아닌가?'
좀 오래 걸리더라도, 또 많은 양을 읽지 못하더라도 책 읽는 시간이 즐겁다면 누구나 책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 장기하 산문집 <상관없는 거 아닌가?> 프롤로그 중
'1년에 몇 권을 읽는지도 사실, 상관없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꼭 한 권 완독을 해야만 독서를 한 것인가? 구입 후 바로, 드라마로 치면 ‘정주행’하는 책이 있는 반면, 한 챕터씩, 한두 문장씩 두고두고 읽게 되는 책도 있다. 그런 책은 언제 스마트폰 앱에 ‘읽은 책’으로 기록해야 하나?
한 반쯤 읽다가 그만둔 책은? 회사 일 때문에 일부분만 발췌독 한 책은? 그건 영영 내가 읽은 책 목록에 올라갈 자격이 없는 걸까? 아닐 거다. 나는 그렇게 배웠다. 완독만이 독서가 아니라고.
그런 의미에서 독서량 늘리겠다는 목표를 단순히 ‘권 수’로 세우는 것은 비추다. 내가 1년에 몇 권 정도의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하다면, 1, 2년 정도 관찰해 보는 걸로 충분하다.
그다음부터는 그냥 편하게, 주변에 책을 늘어놓고, 그날 기분에 따라, 손이 가는 대로, 즐기면 되는 것이다.
숫자 따위 신경 쓰지 말고 철저히 재미를 추구하자. 그렇지 않으면 활자울렁증이 언제 우리를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