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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폼소설] 아군

by 홍윤표

외계인이 침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의 침공은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백악관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원형 우주선은 세계 최강국 미국의 그 어떤 공격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리고 입을 벌리더니 조그만 날파리 같은 비행선들을 쏟아냈고, 그 비행선에서 일렬종대로 걸어 나온 외계인 군대가 십 분 만에 백악관은 물론 워싱턴을 초토화시켰다.

커다란 머리에 왜소한 팔다리, 검고 큰 눈의 외계인의 모습 또한 매우 전형적이었다는 걸 새삼 지적해야겠다.

세계의 수도인 워싱턴이 재가 된 것을 본 핵보유국들은 재빨리 핵미사일 발사 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 조금만 수가 틀리면 바로 우주선으로 핵미사일을 보낼 요량이었다. 어차피 우리 집 앞마당이 아니니 핵을 쏘든 뭘 쏘든 상관없다는 생각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워싱턴에 있는 것과 똑같은 우주선들이 런던과 모스크바, 베이징, 파리, 도쿄, 브라질리아, 뉴델리, 카이로, 프리토리아, 베이루트, 모가디슈, 스톡홀름, 마드리드, 부에노스아이레스, 캔버라, 바그다드 그리고 서울 상공에 나타나면서 결국 버튼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구종말시계가 10초 카운트다운을 세기 시작했을 때, 상황은 급변했다.



"당신들의 지도자에게 데려다주시오."

이 대사 역시 너무나 전형적인 외계인의 대사라 헛웃음이 나와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대사를 친 당사자가 외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의 존재는 외계인만큼이나 우리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 각국의 지도자와 만나길 청했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조금은 지난한 보고체계를 거쳐 청와대로 입성한 이는 키가 무척 커서 집무실 대신 청와대 한편의 회견장으로 안내를 받았다.

층고가 꽤 높은 회견장에서도 머리가 천장에 닿아 허리를 엉거주춤 숙인 더벅머리의 이 외다리 남자는 한 손에 투박한 몽둥이를 들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를 제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도깨비를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린 당신들과 같은 편이오."

한쪽 다리를 꼬아 양반다리를 하고 자리를 잡은 이 거대한 도깨비는 대통령과 장관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린 지구가 멸망하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소."

그의 말에 따르면 그들 역시 어엿한 지구의 시민권자라는 거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그들이란 도깨비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었다.

세계 각국의 지도자와 면담을 청한 이들은 가지각색이었다. 뱀파이어, 미라, 인어, 네시(네스 호의 그 괴물이 진짜 존재했었다!), 빅풋(빅풋도 진짜였다!), 엘프, 구울, 트롤, 갓파, 텐구 등등 우리가 알고 있지만 믿진 않았던 수많은 전설과 신화 속 존재들이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것이다. 심지어 중국에선 용이 천안문 광장에 똬리를 틀고 주석과 만났다고 한다.

"우리는 결코 인간과 친하다고만 볼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 저 돼먹지 못한 잡것들이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건 못 참소."

그들은 비록 전설 속의 존재들이지만 그건 우리 인간 입장에서 봤을 때 얘기고, 그들도 그들 나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고 발을 땅에 디디고(혹은 하늘이나 물속을 유영하고) 살아가며 실재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이목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들만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지구는 그들에게도 삶의 터전이고 고향인 셈이다.

"우리와 손 잡읍시다."

대통령은 거친 털이 수북하고 통나무처럼 굵은 도깨비의 손을 맞잡았다. 모양새가 마치 네 살 아이가 아빠 손가락을 잡고 흔드는 꼴이었지만 아무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각국 정부와 일종의 군사협정을 맺고 동맹이 되었다. 외계인에게 본보기로 당해서 자존심에 심하게 스크래치 간 미국은 선더버드에게 하늘을 맡겼고,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를 비롯한 발칸반도의 국가들은 뱀파이어 군단을 자국군에 편입시켰다. 국제적십자사연맹과 국제헌혈자조직연맹이 긴급 투입된 건 정말이지 다행스러운 일이다. 영국은 네스호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네시 때문에 발을 동동 굴렀지만 용맹한 헬하운드 떼가 헥헥거리며 다우닝 가 10번지 앞 대로를 뒤덮자 마음을 놓았다. 총리는 그중 한 마리의 턱을 쓰다듬으려다 하마터면 손모가지가 날아갈 뻔한 뒤로 먼발치서 박수만 쳐주기로 했다. 일본 총리는 자위대와 합심한 텐구와 갓파 무리를 데리고 야스쿠니 신사에 가려다가 그런 잡신들한테는 절대로 절을 하지 않겠다며 텐구가 노발대발하는 바람에 조용히 관저에 수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전대미문의 지구방위연합군이 결성된 건 우주선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시카고 대학의 과학자들은 지구종말시계의 초침을 당겨야 할지 늦춰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그냥 일단 내버려 두기로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지구방위연합군이 결성하는 와중에도 우주선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연신 비행선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미 대피령이 내린 지는 오래였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시민들이 집 지하실과 전철역, 민방위 대피소로 피신해서 외계인들의 커다란 눈동자에 띄지 않길 기도했다.

처음 외계인과 교전이 벌어진 곳은 카이로였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이집트는 자국 육군을 카이로로 집결시켰고, 이 위대한 맘루크의 후예들은 카이로 도심을 점령한 외계 부대와 꽤 준수하게 싸웠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는 역시 미라 군단과 스핑크스의 대활약이었다. 외계인들이 아무리 강력한 광선총 공격과 독성 연무를 뿌려대도 미라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미 죽은 자들은 결코 죽을 수 없다는 말장난 같은 아이러니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사막에서 오랜 시간 동안 쌓여있던 모래먼지를 훌훌 털고 일어선 스핑크스들은 그 거대한 몸집으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몸놀림으로 외계인들을 쓸어 버렸다. 앞발을 휙 저어 지상의 외계인 부대를 쓰러트리는 그 모습을 본 종군기자 피트 제럴드 씨(35)는 훗날 우주전쟁 기획기사에 이렇게 썼다. '순간 우리 집 밍키(스코티시폴드 종)가 솜뭉치를 갖고 놀던 모습이 떠올랐다.'

카이로 다음으로 승전보를 울린 곳은 브라질이었다. 아마존 정글에서부터 수도방위를 위해 브라질리아로 온 마핀구아리 떼들은 흉측한 외모와 지독한 악취 때문에 안 그래도 불안에 떨던 시민들을 더욱 공포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특유의 잠복 기술로 주요 길목 곳곳에 매복해 있다가 소리 없이 적군에게 접근해 날카로운 발톱으로 외계인들의 사지를 갈가리 찢어버리자 시민들은 그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가족들과 피난 가다가 도로 위 차에 갇혔던 제제 코스타 씨(56)는 "마핀구아리의 꼬물거리는 주둥이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이 외에도 미국의 선더버드는 워싱턴을 접수하고 뉴욕으로 북상하던 우주선을 쫓아가 날갯짓과 울음소리로 만들어낸 천둥 번개를 시커먼 선체에 내리꽂았고, 모스크바의 마녀 군단 바바야가들은 한 손에 빗자루를 들고 낡은 절구를 타고 다니며 우주선이 비행선들을 뱉는 족족 격추시켰다. 빗자루는 낙엽 쓸기에만 유용한 게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괄목할 만한 곳은 대한민국의 서울이었다. 청와대를 방문한 도깨비가 자신의 친구들을 소집했을 때 사람들은 도깨비가 그렇게 많은 종류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사람보다 작은 것부터 구름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까지 각양각색의 도깨비가 장난스럽게 춤을 추며 몰려오자 서울 시민들은 물론 외계인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입을 반쯤 벌리고 멀뚱히 서서 도깨비들의 춤판을 보던 외계인들은 도깨비들이 단체로 "뚝-딱!"이라고 외치며 방망이를 휘두르자 한순간에 귀여운 토끼로 변했다. 카페 테이블 밑에 숨어 현장을 지켜보던 시민 구봉나 씨(26)는 "순간 '뿅'이라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거인 도깨비 셋이 우주선을 둘러쌓고 "뚝딱!"이라고 우렁차게 외치자 시커먼 우주선은 커다랗고 새하얀 뭉게구름이 되었다. 서울 시민들은 지하실과 방공호에서 뛰쳐나와 길거리를 점령한 토끼들을 얼싸안고 뭉게구름을 올려다봤다.


전 세계의 승전보는 계속 이어졌고 드디어 외계인들은 꼬리를 내렸다. 격추되거나 뭉게구름이 된 우주선을 제외한 나머지 우주선들이 대기권 밖으로 쓩- 하고 날아갔다.

정말이지 도망칠 때 마저 너무 전형적이라 이제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들의 꽁무니에 통쾌해하면서도 애당초 왜 그들이 우리 지구에 쳐들어왔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아무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계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그들은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외계인도, 뱀파이어도, 용도, 그리고 도깨비들도.


우린 이전처럼 세계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지구는 우리만의 것이 아니란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전설과 신화의 대부분은 이제 역사로 편입되어야 했다. 역사학자들과 신학자들과 민속학자들이 아주 바빠질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직접 나서서 도와줄지도 모르겠다. 구술사와 같은 방법이 유용할 것이다. 민속촌과 역사박물관의 한편에는 테마파크에서 옮겨온 유령의 집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분명 우리의 친구는 아니다. 위험한 존재들도 있다. 그렇지만 우린 함께할 것이다. 지구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이 지구에서 같이 발을 딛고 서있는 한.



이렇게 이야기가 끝난다면 참 훈훈하고 아름답겠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외계인이 퇴각하고 정확히 반년 후, 거대한 우주선이 다시 백악관 상공에 출몰했다. 지난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거대한, 정말 거대한 우주선이었다. 당시 백악관 재건 현장에 있던 십장 레이먼드 맥퀸 씨(38)의 말에 따르면 "그들의 선체가 포토맥 강을 너머 저 멀리 리온 빌리지까지 뻗어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우주선은 이번에도 그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렸고 그 안에서 수많은 날파리 비행선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비행선들이 다 나온 뒤에도 닫히지 않던 그 입은 커다랗고 시커멓고 끈적한 무언가를 꾸역꾸역 토해냈다. 얼핏 봤을 때 거대한 문어를 닮은 그것은 아닌 게 아니라 다리가 정말로 여덟 개였다. 우주선의 문틀을 부여잡고 스멀스멀 기어 나온 그것은 지상에 쿵- 하고 착륙한 뒤 촉수 같은 다리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눈에 보이는 건 마구잡이로 깔아뭉개고 다녔다.

우주선은 워싱턴뿐 아니라 전 세계의 다른 도시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출몰했다. 그리고 외계 문어 외에 다른 거대 괴생물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말미잘, 해삼, 멍게 등 해산물들을 연상케 하는 그것들은 흐느적거리며 도시를 휩쓸었다.

이번에도 도깨비와 그 밖의 존재들이 나섰고 예의 그 지구방위연합군이 편성되었다. 하지만 전처럼 쉽지 않았다. 도깨비 중 가장 큰 거인 도깨비도 해산물의 (그 음침하고 게슴츠레한 검은) 눈을 마주치기 위해 고개를 들어야 할 정도였다. 또한 거대한 해산물들의 말랑한 몸뚱이는 그 어떤 공격도 가볍게 튕겨 냈다. 심지어 도깨비가 "뚝딱!" 하며 휘두른 방망이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당황하여 더벅머리를 북북 긁고만 있던 도깨비들은 말미잘 같은 괴생명체의 촉수에 돌돌 말려 먼 산 언저리마다 처박혔고, 그들이 있던 자리엔 수백 년 묵은 비듬만이 우수수 떨어져 거리 위에 소복이 쌓였다.


지구는 당혹감에 빠졌다. 그렇게 믿었던 지구방위연합군이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줄줄이 나가떨어졌다. 지난번과는 차원이 다른 외계인들의 전투력을 이상하게 여긴 전문가들은 조심스럽게 이런 추측을 내놓았다.

저 해산물들은 외계인의 다른 존재들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뱀파이어, 도깨비, 미라가 나타나 지원했듯이 외계인들에게도 비슷한 존재가 나타나 지원을 한 것이다.

외계인들에게도 신화나 전설 속 괴물들이 있다고?라고 반문했다가 그럼 없다고?라고 또 반문을 들으면 할 말이 없었다. 우린 그만큼 외계인들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탈리아 육군 특수부대사령부 제185폴고레 공수정찰표적획득연대 소속의 엔쪼 스폰짜 중위(25)는 이후 참전군 인터뷰에서 키메라와의 연합작전 중에 본 희한한 광경을 말했다. "외계인들이 프리투라 디 칼라마리(이탈리아 갑오징어 요리)에나 어울릴 것 같은 커다란 오징어를 두려워했고, 그 오징어는 우리를 공격하면서도 발치에 있는 외계인들은 신경 쓰지도 않고 마구 밟더라."

이처럼 전문가들의 추측을 뒷받침하는 목격담들이 속속 쏟아지면서 이 추측은 기정사실이 됐다. 미국의 호러 작가 러브크래프트의 광팬들은 아우터 갓이니 그레이트 올드 원이니 떠들었고, 몇몇 얄팍한 종교 장사치들은 신의 강림과 종말과 구원을 입에 거품을 물며 외쳤다. 누가 뭐라든 외계인의 괴물들은 도시를 마구잡이로 파괴했고, 시카고 대학의 과학자들은 지구종말시계고 자시고 서둘러 피신해야 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상황은 다시 한번 급변했다.



"당신들의 지도자에게 데려다주시오."

아마 다시 한번 이 대사를 듣게 될 거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진부한 대사는 이번 우주전쟁에서 유행어가 될 판이다. 이번에 이 대사를 뱉은 이는 외계인이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당신들과 협상을 하고 싶습니다."

도깨비들에게 포위된 외계인 대표는 방망이를 두려운 눈으로 경계하며 한국어로 말했다. 정확하게는 관자놀이에 달린 조그만 기계장치에서 소리가 나왔다. 외계인은 전보다 더 철저하고 지난한 보고체계를 거쳐 지하벙커의 작은 방으로 안내받았고, 거기엔 어딘지 모를 곳에서 화상연결을 통해 이 쪽을 보고 있는 대통령의 얼굴이 전면 스크린에 떠 있었다.

"당신들과 손 잡겠소."

기시감을 느낀 건 대통령만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지라지만 이건 너무나도 극적이지 않은가.

"저들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우린 이 곳이 파괴되는 건 원하지 않소."

그들의 말은 이러했다. 외계인들이 지구에서 처참하게 패한 후 자기 별로 돌아가 침울해하고 있을 때, 괴물들이 나타났다. 그들도 괴물들의 존재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놀랐다고 한다. 그것들은 지구를 공격하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고 외계인들은 얼씨구나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 와서 하는 짓들을 보니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단다. 자신들은 이 별, 지구를 이용하기 위해 왔지 파괴하기 위해 온 건 아니다. 하지만 저들을 그냥 놔뒀다간 이 별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그럼 애초에 이 별에 온 이유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외계인 자신들의 목숨마저 위협하고 있다.

"우리 전설 속의 그것들은 정말 무지막지한 존재들입니다. 오로지 파괴만을 좋아하는 그들의 습성을 잠시 잊었던 겁니다."

커다란 까만 눈을 반쯤 감으며 침통해하는 외계인에게 대통령이 물었다.

"그런데 왜 처음 여기 왔을 때 우리를 공격한 겁니까?"

"아닌데요? 너네가 먼저 공격했는데?"

왜 갑자기 반말을?이라고 생각할 겨를 없이 대통령은 기억을 곱씹었다. 그랬던가. 그랬다. 처음 백악관 상공에 우주선이 나타났을 때 미군이 있는 포 없는 포 다 끌어모아 발사했었다. 이 빌어먹을 꼴통 전쟁광 같으니. 막판까지 언제 어디서나 속을 썩이는구나. 대통령은 미국에 다이렉트 콜을 걸까 하다 말았다.

대신 외계인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당신들이 지구에 온 목적이 뭐요?"



다시 한번 지구방위연합군이 재편됐다. 지구인, 다른 존재들, 외계인으로 구성된 이 사상 초유의 연합군은 각국 지하 벙커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외계 해산물들을 물리칠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간단했다.

"그 녀석들한테 새로운 별을 정복할 거라고 말해보려고."

통역 장치(관자놀이에 붙은 그 기계장치)가 고장 나서 반말만 하는 예의 그 외계인 대표가 제안했다. 언제나 파괴에 굶주린 해산물들에게 새로운 별은 포장을 뜯지 않은 딸기 케이크나 마찬가지다. 이제 이 별에선 뽑아 먹을 게 없다고 설득하고 다시 우주선에 태운 뒤 다른 곳으로 가는 거다.

"다른 곳 어디로?"

상대가 반말을 하는데 혼자만 계속 존대하기 뭐해 말을 놓기로 한 대통령이 물었고 외계인은 나뭇가지처럼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에는 활활 타오르는 태양이 걸려 있었다.


외계인들은 해산물들을 설득했고 생긴 것처럼 단순한 그것들은 기다란 촉수를 말아 쥐고 우주선으로 꾸역꾸역 되돌아갔다. 외계인들은 해산물들을 잔뜩 실은 우주선의 목적지를 태양으로 입력하고 자동항해 모드로 설정했다. 외계인 자신들은 당연히 타는 척만 하고 타진 않았다. 그들은 우주선이 대기권 밖으로 나갈 때까지 지구인들과 같이 숨었다. 지구인들은 흔쾌히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렇게 거대한 해산물들을 태운 거대한 우주선들은 태양으로 향했고, 입맛을 다시며 새로운 별에 내리기만을 고대하던 해산물들은 태양을 구경해보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지구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벙커에서 나온 각국의 대통령들과 만난 외계인 대표들은 한 방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협약서에 서명했다. 외계인들은 물론 손님의 입장에서 지구의 방식을 따랐다.


트라피스트-1e 성간 휴게소 공동 설립 협약서


전에 대통령이 지구에 온 목적을 물었을 때 외계인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우리는 최근 새로운 관광지를 개발했어. 너희 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야. 거긴 물도 있고 온도도 적당해. 그리고 뭣보다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자연이 인상적인 곳이지. 요즘 그런 별을 발견하는 게 쉽지 않거든. 너희 별만 봐도 그렇잖아? 하지만 거기에 가려면 일반 여객용 우주선의 연료로는 어려워. 군사용 우주선 정도는 돼야 갈 수 있지. 그래서 우린 생각했어. 우리 별과 그 별 사이 적당한 곳에 연료를 충전할 곳을 물색하기로. 그리고 이왕이면 연료를 넣는 동안 쉬면서 밥도 먹고 약간의 여흥도 즐길 수 있는 곳 말이지. 그렇게 찾은 곳이 여기, 너네 별이야."

대통령은 말했다.

"어… 그러니까, 지구를 고속도로 휴게소로 쓰겠단 말이야?"



지구 재건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외계인들은 자신들의 기술로 지구 곳곳에 휴게소를 만드는 동시에 망가진 도시를 재정비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도깨비를 포함한 다른 존재들은 저번처럼 왔던 곳으로 돌아갔고, 간간이 인간 세상으로 나와 인간들과 외계인들과 함께 어울려 도시를 재건하는 데 일조했다.


지구는 휴게소로서 크게 번성했고 인간과 외계인과 전설 속 존재들이 공존하는 신세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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