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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폼소설] 지하철 1호선

by 홍윤표

단어에는 고유의 힘이 있다. 각자의 주관에 따라 해석은 다양해지지만, 그 누구도 단어가 태어날 때부터 저 밑바닥에 심어진 고유의 힘은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
아주 가끔 그 고유의 힘을 만질 수 있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어떠한 단어를 읊조리면 그 단어가 현현하여 살아 움직이게 된다고 한다. 옛 성인들이 단어의 힘을 가지고 종종 기적을 행했다고 전해지는데, 근대 들어서는 그리할 수 있는 자들이 전무했다. 경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평범한 회사원인 경수는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데 어느 날 출근길 아침에 무심코 지하철 노선도를 보다가 단어 고유의 힘을 건드리게 되었다.
경수가 수원을 읊조리자 수원에서는 갑자기 터져 나온 지하수로 도로가 침수되었고,
명학을 읊조리자 안양의 명학역 주변에 두루미떼가 날아와 시끄럽게 울어대며 하늘과 거리를 잠식했다.
구로를 읊조리자 하늘에서 거대한 아홉 명의 노인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도시 여기저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가장 큰 피해는 용산에서 나왔다. 경수가 용산을 읊조리자,
높은 빌딩들 사이로 두 마리의 용이 출몰하여 도시를 휘저으며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모든 사달을 낸 주인공 경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역 이름을 계속 읊조렸고,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문제를 해결해 갔다.
봉명을 읊조리자 하늘에서 봉황이 내려와 명학역의 학들을 물어갔고,
금정을 읊조리자 지하에서 우물이 솟아나 수원의 지하수를 빨아들였다.
백운을 읊조리자 아홉 명의 노인들은 하얀 구름을 타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고,
회룡을 읊조리자 두 마리의 용이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경수는 광명역에서 내리며 역 이름을 읊조렸고.
세상은 밝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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