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숙소를 예약하면서 주변 관광을 계획한 곳은 레체와 오트란토 두 곳이 전부였다. 그제와 어제 두 군데 다 방문했으니 이제 어딜 가지. 아내도 아침에 조식을 먹은 뒤 "우리 오늘은 어디 가?"라고 물어봤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숙소에서 뒹굴자." 마침 딸 유라가 그렇게 노래하던 수영장을 아직 한 번도 안 들어갔으니 오늘 느긋하게 숙소에서 수영이나 하면서 보내면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여행을 오면 꼭 풀어야 하는 숙제가 있다. 바로 기념품 선물. 난 휴직 중이라 걱정이 없었지만 아내는 사무실 동료들에게 돌릴 선물을 내내 고민했더랬다. 마침 숙소에서 레체로 올라가는 중간에 대형 마트가 있어서 일단 오전에 거기를 후딱 돌고 와서 수영을 하기로 했다.
우리가 갔던 이탈리아 대형 마트인 스파지오 코나드(spazio conad)는 마치 우리나라 롯데마트나 홈플러스 같은 분위기였다. 의류와 액세서리, 신발 등을 파는 가게들이 있고 한쪽에는 식료품, 잡화 등을 파는 대형 슈퍼마켓이 있었다. 기념품 선물을 뭘 살까 고민하다가 여행 전에 읽은 이탈리아 여행 책에서 하나같이 선물로 추천했던 치약을 사기로 했다. 부피도 적고 한국보다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어 최대한 많이 챙겼다. 선물고민을 해결한 뒤 우린 편한 마음으로 마트를 둘러보았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우리나라 마트와 비슷했다. 먼저 유라 인형을 둘러보았는데 전날 오트란토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마땅한 제품이 없었다. 조금 우울해하는 유라를 다독이며 대신 과자로 시선을 끌었다. 초콜릿 잼으로 유명한 누텔라 과자가 맛있다고 해서 여러 종류를 고르고, 숙소에서 마실 병맥주를 샀다. 나는 캔맥주보다는 병맥주를 훨씬 좋아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병맥주 종류가 그리 많지 않아 항상 아쉬웠다. 하지만 이탈리아에는 거의 대부분 병맥주였고 종류도 어마어마했다. 맥주에 정신이 팔려 헤롱거리는 동안 아내와 딸은 생수를 골랐다.
오늘 하루는 숙소에서 지내기로 했으니 마트에서 파는 음식을 사서 숙소에서 먹기로 했다. 우선 빵 사이에 고기와 야채를 넣은 파니니를 고르고 또 뭘 살까 고민하는 중에 어떤 아저씨가 통닭을 4마리나 포장하는 걸 보고 우리도 같은 걸 주문했다. 음식을 산 뒤 주류매장에서 와인을 골랐다. 아내가 지인에게 추천받은 이탈리아 와인이 없길래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같은 이름이지만 병 모양이 조금 다른 와인을 알려줘서 일단 그걸 골랐다. 그리고 아내가 아페롤 스프리츠가 맛있었는지 집에서도 먹자고 해서 한 병 사고, 난 책에서 읽은 뒤 맛이 궁금했던 리몬첼로를 샀다.
꽤 많은 짐을 카트에 싣고 우린 슈퍼마켓 옆에 있는 작은 바(이탈리아에선 서서 커피를 마시는 곳을 바라고 부른단다)로 갔다. 사실 대형 체인점에 들어와 있는 곳의 커피라 크게 기대는 안 했는데 웬걸, 아주 맛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탈리아에서 마신 에스프레소 중에서 이 집이 제일 맛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아내와 난 에스프레소 맛에 크게 놀라며 입에 털어 넣었다. 여행 전 읽은 방송인 알베르토가 쓴 책을 보니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 설탕을 넣고 조금씩 단맛을 느끼다가 마지막에 바닥에 녹은 설탕을 긁어먹으며 마무리한다고 해서 따라 해봤다. 씁쓸한 에스프레소를 맛본 뒤에 설탕의 단맛으로 마무리하고, 같이 나온 생수로 입가심을 했다. 완벽했다. 에스프레소, 설탕, 생수 이 모든 과정이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방법이구나. 씁쓸한 줄로만 알았던 에스프레소를 조금씩 즐기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도 에스프레소를 조금은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후 1시쯤 숙소로 돌아와서 마트에서 사 온 음식들로 점심을 때웠다. 통닭은 생긴 게 마치 우리나라 전기통닭처럼 생겼는데 맛도 비슷했다. 같이 사온 파니니와 브루스케타를 먹고 유라와 나는 숙소에 딸린 작은 수영장으로 갔다.
한낮이라 숙소에는 우리밖에 없어서 작은 수영장을 풀빌라처럼 전용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요즘 수영을 배우기 시작해서 한참 물놀이에 진심인 유라와 나는 신나게 잠수를 하고 물속에서 춤도 추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지친 나는 선베드에서 조금 쉬면서 맥주를 마셨고, 방에서 낮잠을 자다 내려온 아내도 에스프레소 한 잔을 들고 선베드에 누웠다.
선베드에 편하게 자리를 잡자 눈이 스르르 감겼다. 따사로운 햇살이 선베드로 내리쬐고 한 손에는 시원한 병맥주를 들고 한편에서는 유라가 신나게 물놀이를 하는 소리가 들리고 옆에는 아내가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책을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곳은 이탈리아의 조그만 시골 마을. 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한국에 돌아가도 오랫동안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마치 행복이라는 무정형의 추상적인 개념을 지금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다는 실감. 이번 여행의 목적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