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속으로
입시를 위하여
고교 학점제가 시행된 이후, 학교에서는 교사가 여러 과목을 수업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많은 교사가 생소한 과목을 수업한다.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과목들은 대부분 수능에 출제되지 않는, 말하자면 입시와 직결되지 않는 과목들이다. 그리고 시험을 보지 않으며, 수행평가만으로 채점한다. 누군가는 이 설명을 듣고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 주는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할지 모르겠다. 나 역시, 이 시도의 일원이 되었다.
교과서를 받아 들고, 다른 선생님들의 경험을 연수로 접한 후 나만의 계획을 수립해서 교실에 들어갔다. 교과목 이름은‘세계 문제와 미래 사회.’ 세계적으로 중요한 이슈들을 수업 시간에 다루어볼 수 있는 좋은 교과목이다.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만큼, 과감하게 분필을 내려놓고 학생들의 발표와 질문을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첫 시간이 되었다.
‘이 수업은 발표와 질문으로 진행할게. 모둠을 구성해서 발표를 준비하고, 10분 내외로 발표를 한 뒤 청중의 질문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할게. 프레젠테이션의 구성, 발표 내용, 질문에 대한 대응을 기준으로 평가할 거야.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 성의 있게 임하기만 하면 점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교육학 시간에 배운 학생의 주도성. 내용의 의미. 협동학습의 장점. 이런 것들이 모두 발휘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나의 시도는 몇 시간 만에 산산이 조각났다. 입시에 크게 반영되지 않는 이 교과목을 학생들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학생이 발표 시간 10분을 채우지 못했다. 질문하는 학생들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었고 질문에 대한 답도 갈수록 짧아졌다. 학기 중반이 되자, 어떤 학생들은 아예 발표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준비를 못 했어요. 그냥 0점을 맞을게요’
이 말 앞에서, 나는 다시 ‘분필’을 떠올렸다. 분필은, 최소한 수업이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의미와 재미는 몰라도, 50분을 수업으로 만들 수는 있었다. 하지만 준비 없는 발표 수업은 무엇도 할 수 없는 시간을 만든다. 반면, 입시에 직결된 상대평가 과목 수업의 발표는 분위기가 달랐다. 학생들은 긴장하고, 또 부담을 가지면서도 최대한 주어진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애를 썼다. 발표가 끝난 후에는 그에 대한 평가를 궁금해하며 의견을 물어 오기도 했다. ‘입시와 얼마나 가까운가’는 학생들이 수업이 임하는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된 지 오래다.
이토록 차가운 서열화
공립학교 교사는 근무지가 계속 바뀐다. 남고와 여고, 공학을 오가고 때로는 농촌과 도시를 이동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수업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학생들의 성향도, 부모님들의 성향도 제법 다르다. 학교의 유형(일반고와 자립형 사립고, 외국어고, 과학고 등) 과 위치(흔히 ‘학군’으로 구분되는 기준)에 따라 수업의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일부 학교에서는 여전히 수업 중심의 문화가 유지되지만, 다른 곳에서는 수업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거나 아예 ‘시간 때우기’로 전락해 있기도 하다. 나 역시 여러 학교를 이동하면서 그 차이를 실감했다. 어떤 학교에서는 나 자신이 꽤 괜찮은 교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뛰어난 건 학생들이었다.
최근에는 학생들 간에 문해력의 차이가 두드러지고 있다. 코로나가 지나가면서, 전자기기에 익숙해진 학생들을 중심으로 기초적인 수준의 어휘력이 감소하는 일이 허다하다. 특히 한자어에 대한 소양은 충격적이기도 하다. 이 문해력 역시 학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문해력이 갖추어지면, 수업을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면 재미있어진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50분 내내 듣고 있다면, 누구라도 괴로울 것이다. 아쉬운 점은, 날이 갈수록 괴로움에 빠져드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끝없이 이어진 강
수업은 불안과 두려움의 원천이다. 하지만 동시에 교사로 하여금 직업에 대한 자긍심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하루 사이에도 수업이 잘 되었을 때는 천국에 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가 다른 시간에 수업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존재가 된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는 것이 교사다.
특히 수업이 잘 되었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연결되었다는 느낌은 교사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동이다. 아쉬운 점은, 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환경적인 요인들은 점차 줄어들고 불안과 두려움의 씨앗들은 사방에서 뿌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고정된 답은 없다. 어떤 것이 답인 것처럼 보이다가도 전혀 아니었다는 생각으로 접어들 때도 많다. 그것은 학생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1년 전에는 성공적이었던 수업이 올해에는 실패로 끝나기도 한다. 결국 학생을 보며 수업을 계속 바꾸는 수밖에 없다. 수업은 두려움을 안고 건너야 하는, 끝없이 이어진 강이다.
생활지도, 배우지 못한 전문성
나는 지난 15년의 교직 생활 중 10년을 담임 교사로 보냈다. 그리고 항상 30명 이상의 학생을 맡았다. 아침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학생들의 임시 보호자로서의 시간을 보냈다. 그 일은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몸이 아파서 오늘 결석합니다.’
‘생리통이 심해서 결석합니다.’
‘병원에 가느라 지각해요’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의 문자와 전화를 받으며 출근 준비를 하고 학교에 도착한다. 가끔 학생들을 ‘혼내야’하는 일도 생긴다. 지각을 한 학생, 수업 시간에 불량한 태도로 임한 학생, 혹은 친구와 문제를 일으킨 학생. 하지만 나는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전문적으로 배워 본 일이 없다. 내가 교육받은 것은,
‘일반 교육학, 교과 교육학, 교과 내용학’
이런 것들이었다.
‘학생과 학생이 싸웠을 때의 대처 방법’
‘학생이 교사에게 반항할 때의 대처 방법’
‘가정이 화목하지 않은 학생과 수업 하는 법’
이런 것들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말도, 배워 본 적도 없다. 사실 생활지도는 많은 부분 교사가 살아온 개인적인 삶의 경험에 기대고 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혼나 본 방식대로 학생들을 훈계했고, 가끔 읽어 본 책들의 내용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 방법이 맞는 건지, 정답이 있기는 한 건지 끝없이 고민하면서 이른바 ‘생활지도’라는 것에 임해 왔다.
나의 생활지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교과서는 주변 선생님들이었다. 여러 선배 교사와 동료 교사들의 경험을 어깨 너머로 지켜보고, 때로는 직접 조언을 들으면서 학생들을 대하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 왔다. 그래서 두렵기도 하다. 다른 선생님이 나를 보고 참고하지는 않을까. 겉으로 보이는 확신과는 달리 내면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소신’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된 생활지도
초임 교사 시절, 나는 하루도 고민과 번민이 없었던 날이 없었다.
‘오늘 했던 그 말이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까?’
‘너무 심했던 건 아닐까?’
‘아니, 너무 약하게 말한 게 아닐까?’
‘내가 했던 말이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던 시절, 당시의 고민은 그나마 ‘학생에 대한 영향’에 있었다. 내가 섣부르게 내뱉은 말과 지도의 방식이 과연 옳은 방식인가에 대한 고민. 그런 것들이 늘 내면에 담겨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고민의 성격과 방향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학생들 사이에 어떤 일이 발생하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혹은 ‘이게 교사가 개입할 정도의 문제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처리해야 민원의 소지가 없을 것인가’를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이런 질문을 심심치 않게 받는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조치하셨습니까?’
생활지도와 관련해서 학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교사라면 이러한 질문을 한 번쯤은 받아 보았을 것이다. 질문의 의도가 사실의 확인이던, 교사에 대한 추궁이던 이 질문 앞에서 교사들은 자기변호를 시작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조치가 다음에는 설명을 요구하는 행동이 될 수도 있다.
생활지도의 수단에 있어서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훈계’나 ‘질책’은 위험을 동반하는 수단이 되었다. 학생의 감정 상태나 받아들이는 해석에 따라, 지도는 쉽게 ‘학대’나 ‘폭언’이 될 수도 있다. 교사는 말끝을 흐리거나 지도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다. 생활지도는 본래 감정노동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위험한 감정노동’이 되었다.
위험한 일을 감행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생활지도는 이제 번민을 넘어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용기를 갖는 일이 옳은 것인지도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학생들을 강하게 꾸짖고 혼낼 권위가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학생과 관련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우선순위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순서 변경의 중심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 두려움 때문이다.
완벽해야 하는 평가
시험 날. 아무리 노력해도 긴장을 감출 수 없다. 혹시라도 문제에 오류가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 이의를 제기하는 건 아닐까. 걱정에 걱정이 꼬리를 문다. 문제를 몇 번이고 검토했는데도 불안하다. 시험이 끝나고 일주일 정도가 지났는데도 별다른 말이 없으면 그제야 안도감을 느낀다.
시험문제를 출제할 때, 그리고 결과를 분석할 때 단골로 나오는 말이 있다.
‘이 정도 난이도면 1등급이 가려지겠지요?’
‘1등급 나오나요?’
‘몇 점부터 1등급인가요?’
이쯤 되면, 학교 시험의 목적은 1등급 가려내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1등급은 상위 4%다.(2025년 현재 고1부터는 상위 10%) 100명 중 4명. 이 학생들의 성적을 정확히, 그리고 오류 없이 가려내는 것이 학교 시험의 가장 중요한 의무다.
행여라도 문제에 오류가 있으면, 큰 민원의 소지가 된다. 한 문제 때문에 1등급이 갈리고, 이른바 ‘최상위권’ 대학에 가고자 하는 학생들이 피해를 보면 더 큰 문제가 된다.
케케묵은 교육학의 오래된 정의에 따르면, ‘평가’란 학생들의 성취를 점검하고 이를 바탕으로 향후 교육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이런 시각으로‘평가’를 다루는 경험을, 최소한 나는 해 본 경험이 없다. 입시제도와 경쟁체제는 속에서 평가란 ‘무결점을 요구되는 변별의 업무’일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몇 번 문항의 오류를 낸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학생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문항의 오류는 열심히 공부한 학생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다. 성실히 공부했는데도 문제의 오류 때문에 점수를 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학생에게 교사가 피해를 준 것이다. 악의 없는 실수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평가가 가진 두려움의 실체다.
서글픈 일은 수업도, 평가도 결국 상위권 학생들을 가려내는 과정으로 수렴되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오류의 평가’를 해 내는 일이다. 결국 학교는 객관식 시험문제를 낼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왜 학교가, 특히 평가가 바뀌지 않느냐고 비난한다. 때때로 나는 이렇게 속으로 대답한다.
‘학교를 둘러싼 세상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단순화와 극단화의 산실, 미디어 속의 교사
SNS와 TV, 라디오, 포털에서는 심심치 않게 교사가 등장한다. 가끔 학교를 다룬 시리즈물도 있다. 학교는 교사의 삶의 터전이기에, 나는 이런 콘텐츠들을 관심 있게 시청해 왔다.
미디어 속의 교사들은 많은 경우 교사를 선과 악, 유능과 무능의 4가지 기준으로 나누어 묘사된다. 착하거나 나쁘거나. 유능하거나 무능하거나. 뉴스를 보면, 교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따뜻한 미담과 패륜적인 사건 중 하나다. 그게 아니라면 비극적인 사건의 피해자인 경우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현실의 교사들은 이 극단적인 이미지들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실체도 늘 유동적이다. 올해는 좋은 교사였다가 다음 해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어떤 학생에게는 훌륭한 교사인데, 또 다른 학생에게는 그렇지 않은 교사이기도 하다. 어떤 학생은 SNS에 이런 이야기를 써 놓기도 했다.
‘**(내 이름). 지겨운 수업. 얼굴만 봐도 졸림.
공개되어서 누구나 볼 수 있는 인터넷 공간에 적힌 있던 이 한 줄의 문장은 오랜 시간 동안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고민에 고민을 이어가던 와중에 글은 사라졌고, 시간은 흘러서 다음 해가 되어버렸다. 반면,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고, 수업이 종료된 연말에 진심이 담긴 존경의 편지를 건네준 학생도 있다.
‘선생님을 보며 교직의 꿈을 키웠습니다’
놀랍게도, 나에게 어떤 학생이 적어 준 문장이다. 누군가에게 얼굴만 봐도 졸린 나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교직의 꿈을 갖게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렇게 교사는 단순하게 정의하기에는 너무나 다채로운 존재다. 심지어 나 자신도 내가 학교에서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른다.
행정 업무, 유능함의 기준
교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많은 사람들이 수업하고, 또 학생들의 생활을 지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교사들에게는 한 가지 임무가 추가된다. 바로 ‘행정업무’다.
공문을 처리하고 또 보고하는 일. 행정업무를 간단히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행정업무의 내용을 전부 설명하자면 이 책 전체를 할애해도 부족할 것이다. 교사의 행정업무는 종류가 다양하고 부담의 크기도 제각각이다.
나 역시 해마다 여러 종류의 행정업무를 수행해 왔다. 맡은 업무에 따라 부담의 정도는 늘 달랐다. 때로는 행정업무가 학생 지도 못지않게 힘들기도 했고,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어려웠던 점은 생각의 전환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수업이 없는 공강 시간에 업무를 하다가 수업에 들어가 분필을 잡으면 조금 전까지 몰두하고 있었던 일의 잔상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교무실에 돌아오면 분필을 잡고 진행했던 수업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행정업무의 특징은, 그것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기 쉽다는 점이다. 수업이나 생활지도의 경우에는 그 성과를 측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행정업무의 경우에는 처리한 공문의 숫자에 그 결과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때로는 수업보다 업무에 몰두하는 교사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이 교사만의 문제일까. 쉽지 않은 질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