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는 돌아올수 있을까
B는 교실에 돌아올 수 있을까
교실의 무기력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오늘도 책상 위에 힘없이, 하지만 무겁게 잠겨 있는 학생들을 보면,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마저 생긴다. 하지만, 무언가 상상하지 않으면 이 교실의 풍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가장 근본적인 대안은 B를 둘러싼 세상이 지금보다 친절해지는 것이다. 선생님, 친구, 부모님이 B에게 말을 걸고, 또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것이다. 당장 운동장에 나가서 축구를 하거나 모둠활동의 리더가 될 수는 없다. 산책을 하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면 충분히 좋은 시작이다. 햇빛과 바람이 좋은 날에는 밖으로 나갈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그 시간만큼은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것. 그것이 이 육중한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은 시작이 될 것이다.
친절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학교의 조건은 학급 당 인원수를 줄이는 것이다. 내가 만난 B는 33명 중 하나였다. 나의 관심은 1/33로 조각나 있었고, B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도 그만큼 쪼그라들어 있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B가 없어도 체육대회와 축제, 청소를 비롯한 여러 학급의 활동들이 문제없이 이루어졌다. 학급의 아이들은 문제없이 친구를 만들었고, 각자 자신만의 추억을 만들었다. 만약 10명이었다면 어땠을까. 축제와 체육대회를 위해, B는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청소도 조금은 더 해야 했을 것이다.
수업 시간도 마찬가지다. 30명 중 한 학생이 잠든 것과 10명 중 한 명이 잠드는 것은 교사에게 전혀 다른 감각으로 다가온다. 왜 잠을 자는지 이야기를 나누어 볼 여지가 3배 늘어나는 것이다. 선생님에게 받을 수 있는 컵라면의 개수도 그만큼 늘어날 수 있다.
학교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노력은 경쟁체제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지는 것이다.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경쟁체제는 교실의 누군가에게 무기력함을 ‘배당’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교실에는 ‘무기력의 총량’이 존재하는 것이다. B에게 비난과 무시의 말을 한 사람이 없더라도, 학교는 무기력을 낳을 수 있다.
지금까지 교육 당국이 발표해 왔던 무수히 많은 정책이 이 경쟁체제를 무너뜨리겠노라고 선언해 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그대로다. 단지 학교에서 시험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이 체제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유치원도, 초등학교도 시험을 보지 않지만, 우리 사회의 아이들은 7살에 이미 학원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을 치르며 선별의 경험을 각인 받고 있다.
결국 우리는 학교를 둘러싼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승자와 패자로 사람을 구분하는 문화. 격심해지는 불평등. 그리고 그 구조의 한 축이 된 학교. 이 구조를 직시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조금이라도 따뜻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이 육중해진 무기력의 체중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많은 B들이 교실에서 잠자고 있다. 그리고 B의 근처에서 누군가가 조금씩 또 다른 B가 되어 가는 중이다. 학교와 사회, 가정이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면 B는 또다시 책상에 몸을 포개어 버릴 것이다.
<육중해진 무기력, 깊게잠든 학생B-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