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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입은 어른들, 미디어가 만든 학교 판타지-3(완)

by 소소인

선과 악. 또는 유능과 무능으로 나누어 진 교사


교사들은 어떨까. 교사들은 학생들보다 더욱 단순화 되는 면이 있다. 선/악으로 나누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헌신적이며 자기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교사와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우고 학생들을을 자신의 출세를 위한 도구처럼 생각하며 부정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악한 교사. 때로는 교사들을 유능함과 무능함으로 나누어 그려내기도 한다. 일타강사처럼 유능한 교사(일타강사를 유능함의 절대적 기준으로 보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수업시간에 가르칠 내용조차 숙지하지 못하는 무능한 교사가 그것이다. 요컨대, 미디어 속 교사들은 선과 악, 유능과 무능 중 그 어딘가로 단순화된다.


하지만 교사들은 유동적인 존재다. 어떤 1년은 유능했다가 다른 1년은 무능하기도 하다. 또 어떤 학생에게는 너무나 좋은 교사이지만 또 다른 학생에게는 최악의 교사가 되기도 한다.


콘텐츠에서는 수업시간에 다양한 활동을 제안하고, 의미를 추구하는 교사가 있다면 항상 딱딱한 강의를 하는 교사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묘사될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설문을 받아 보면, 강의식과 활동식 수업에 대한 선호에는 의외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같은 수업을 하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교사, 누군가에게는 버거운 교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미디어에서 그리는 이른바 '바람직한 교사상'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는 면에서 문제가 있다. 미디어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교사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에게 헌신하는 존재다. 무슨 일이 생기면 24시간 대기했다가 바로 달려나가고 학생들이 요청하면 언제나 상담에 응한다. 현실 속에 이런 교사가 존재할 수 있을까? 교사들에게도 개인으로서의 삶이 있다. 배우자와 자녀가 있기도 하다. 교사들도 학교에서 퇴근하면 또다른 역할이 부여되는 평범한 시민이다.

욕망, 또는 희생으로 이분화 된 학부모


학생과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학부모들에 대한 묘사도 선/악으로 단순하게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미디어 속의 학부모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성적과 대학 진학만을 중요시하는 부모. 또 하나는 자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며 헌신하는 부모다. 그러나 세상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있고, 그만큼의 학부모가 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이 양극단 사이의 어딘가에서 고민하는 존재이며, 그 모습도 하나로 굳어진 것이 아니라 자녀의 상황에 따라 늘 변화한다.


어린 학생들을 학원에 돌리는 학부모들은 과연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려는 악인에 불과할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것은 학벌사회인 우리나라에서 자녀가 최소한의 생존을 하길 바라는 부모의 바람, 사교육 기업들의 마케팅, 육아 공동체의 분위기가 함께 영향을 준 결과다. 자녀에게 사교육을 강요하지 않는 부모님들도 마음 한 켠에는 자신이 부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자리 잡기 마련이다.

학생들이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끝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듯이, 학부모님들 역시 내적으로 항상 갈등하며, 또 변화하는 존재다.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하나의 얼굴로 평생을 살아가지 않는다.


학교 콘텐츠의 긍정적인 얼굴도 있다


미디어 콘텐츠가 학교를 다룰 때 항상 부정적이고 자극적으로만 묘사되는 것은 아니다. 몇몇 작품들은 청소년의 감정과 삶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공감과 위로의 통로를 만들기도 한다. 입시 스트레스나 친구 관계, 가족 갈등 등 현실적인 문제를 섬세하게 다루고 학생들이 겪는 내면의 갈등을 담아내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또한 과장된 설정이 반드시 현실을 왜곡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문제를 더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서 기능할 때도 있다. 학교폭력, 교사의 과로, 학부모와의 갈등 등, 교육에 관한 여러 문제들을 사회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는 경우도 있다.


콘텐츠 속의 학생이나 교사, 학부모는 세대 간 단절된 경험을 이어주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미디어 속 콘텐츠는 트렌드에 민감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흐름을 민감하게 포착할수도 있다. 그 결과가 잘 녹아들여 있는 콘텐츠는 학교에 대한 경험이 서로 다른 여러 세대들이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학교를 다룬 콘텐츠들의 생산과 소비가 학교를 좀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쪽으로 작용하도록 만들기 위한 노력이다. 제작자와 소비자가 모두 그 곳을 바라볼 때, 더 질높은 콘텐츠도 만들어 질 것이다.

미디어가 만든 학교의 이미지, 그 위험한 왜곡


미디어가 그려낸 학교는 -당연하게도- 현실과 큰 간극을 가지고 있다. 어른이 교복을 입고 연기한 학생, 어른의 판타지가 구현된 학교 공간, 단순한 캐릭터가 된 교사와 학부모는 그 어떤 것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문제는 이런 대중 콘텐츠가 널리 소비될수록 학교에 대한 단순화 된 이미지가 보편적으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생긴다는 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미디어에게 학교를 콘텐츠로 만들지 말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고 시도할 수 있는 일은 학교를 다룬 콘텐츠를 다룰 때에는 그것이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표현되지 않도록 하는 문화적 토양을 만드는 일이다. 어른이 만든 콘텐츠를 어른의 시각으로만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관점에서 평론을 하고, 그것이 학생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중심으로 분석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대상을 단순화하고, 또 자극적으로 콘텐츠화하는 것은 뉴미디어가 가진 기본적인 속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콘텐츠 속의 학교는 우리가 맞은 미디어 환경이 빚어낸 여러 모습 중 하나다. 학교에 대한 문제의식은 미디어 환경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 속에서 함께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학교는 뉴미디어에 대한 리터러시 교육을 지속해서 내 나가야 한다. 읽고 쓰는 경험. 그리고 동영상을 비판적으로 보는 경험을 학교는 제공 해 주어야 한다.


학교의 주변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비판적인 눈으로 그 콘텐츠를 바라보고 또 소비하는 과정에서도 그 비판을 유지함으로서 창작자들로 하여금 학교를 또다른 방식으로 콘텐츠 화 하도록 유도하는 일일 것이다.


다만 미디어 속의 학교에 대해 학교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을 내놓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 한가운데에 있는 학교가 혼자만 거기서 역행하여 고고한 존재로 남을 수는 없는 일이다. 범람하는 미디어 콘텐츠의 바다 위에서, 학교는 나침반 없이 북극성을 바라보며 항해하는 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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