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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셈케이 Jan 04. 2023

01 운명이 아니어도 좋아




 어느 항구를 지나다 벽에 쓰인 글을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온 우주의 기운이 더해진 기적 같은 일이다' 서너 번 글을 읽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촉촉이 감성을 자극할만한 글이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온 우주의 기운으로 당신과 내가 만난 것이 아니다. 당신과 내가 만난 건 서로가 서로를 만나기 위해 걸어온 수많은 걸음들이 더해져 마땅히 만나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을 운명이라 여기지 않는다. 내가 밟아온 걸음이, 당신이 겪어온 계절이, 각자가 울고 웃었던 시간들이 우리를 만나게 한 것이다. 혹시 당신과의 끝을 마주했을 때 조금은 덜 아플 수 있도록. 다시 만나지 못할 운명 같은 관계가 아닌 걷다 보면 또 새로이 시작할 용기를 얻도록 나는 당신과 나를 운명이라 여기지 않기로 했다. 사랑이란 묵직한 무게에서 운명이란 추를 꺼내어 버렸다.


 꼭 장황한 스토리를 품지 않아도 좋고 한순간 내리쬐는 섬광 같은 첫 만남이 아니어도 좋다. 평범한 걸음이라도 그 걸음마다 세월의 체취를 묻혀가며 저마다의 보폭으로 그렇게 천천히 서로에게 걸어갔으면 한다. 드라마틱한 운명론이 빠진 사랑에도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기에. 나는 그렇게 사랑을 마주하는 자세를 정립하고서야 감추고 싶었던 사랑에 대한 집념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해볼까 가만히 앉아 고민을 하다 보니 진득하게 오래 만난 당신부터 가슴에 총알이 정통한 듯 쓰라리게 끝난 당신도 튀어나오고 빗자욱 처럼 여전히 마르지 않은 채 마음을 휘젓는 당신까지 뒤범벅이 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얼굴마저 희미해진 당신도 있었고.


 정리를 해야겠다. '이 셔츠는 왠지 봄이 오면 입을 것 같아'하며 옷장 구석에 밀어 넣은 옷마저 모두 꺼내어 정리를 해야겠다. '나는 다 괜찮아졌어' 라며 술잔을 기울이고 돌아오는 길 또 한 번 소리 내어 울던 나의 끈질긴 이 사랑의 감정들도 정리를 해야겠다. 온전한 무로 가기 위함이 아니라 더 나은 시작을 위해 요란한 마음에 질서를 만들어보려 한다. 그 첫 페이지는 고민 없이 당신이다.



 사실 운명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그다지 운명 같은 시작을 경험한 적이 없다. 애석하게도 어린 시절부터 환상, 낭만, 로망 비슷 무리한 단어들과는 거리가 멀던 내게 사랑은 늘 현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서른이 넘어 꽤나 어른의 태가 나는 나이가 되어보니 울고 웃었던 이십 대의 사랑들이 참 소중하고 귀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아직도 꿈에 종종 나타나 내게 안부를 묻는 당신은 내가 가장 뜨겁게 그래서 가장 따갑게 사랑한 남자였다. 또한 내가 만난 남자 통틀어 가장 큰 키의 남자였다. 종종 엄마는 그런 우리를 '고목나무에 매미'같다고 표현했다. 그게 썩 싫지만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당신과 헤어지고 당신만큼 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당신은 철마다 나오는 과일로 청을 한 병도 아닌 무려 대병으로 서너 개 담가 집 앞에 두고 가기 일쑤였고 한 달에 한번 찾아오는 마법 날이면 달달한 과자 꾸러미를 한가득 사주곤 할 만큼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었음에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주는 게 사랑이야'라며 어른스러운 말도 할 줄 아는 당신이었다. 앞서 취업을 한 나는 당신에게 쓰이는 돈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음에도 당신은 연신 내 마음을 거부했다. 나는 그게 참 서운했다. 사랑하는 사이인데 뭐가 문제라고. 우리는 서로 사랑했지만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 당신이 바보 같아서 날 놓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만나던 애인이 내게 그런 말을 해왔다.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는 지금 당신을 만나 다행이야'라고. 나는 그 말에 '서로 더 여유로운 사람이 해줄 수 있는데 못해주는 마음이 그렇게 힘들어?'라고 묻자, '그 마음은 겪어보지 못하면 몰라. 해주고 싶은데 해줄 수 없을 때의 마음. 비참함 그 자체야' 그 말을 통해 나는 그 또한 나와 비슷한 이별을 경험했으리라 짐작과 동시에 과거에 묻혀둔 당신의 마음을 그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해줄 수 없는 마음이. 해줄 수 없는데 받기만 하는 마음이 당신을 얼마나 미안하고 아프게 만들었을지 말이다.


 헤어지고 3년이 훌쩍 지나고서야 내가 부족했음을 받아들였다.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당신의 마음을 헤아렸다면 당신의 부담에 생채기를 내지 않고 묵묵히 옆에서 당신의 힘이 되어줬다면 우리의 끝이 조금은 덜 아팠을까?


 알고 있다. 부질없는 생각이란 걸. 당신이 이 글을 볼 확률은 현저히 낮지만 말해주고 싶다. 당신만큼이나 나를 사랑해준 사람을 감사히 만났지만 결코 당신과 함께한 그 시절, 계절, 마음의 온도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앞으로도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을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주문한 커피가 나오면 하늘 높이 들어 시럽과 커피를 열심히도 저어주던 당신의 모습덕에 여전히 카페만 가면 당신이 종종 떠오른다는 사실을.


 우리를 운명이라 일컬을 순 없지만 청춘의 대제목정도는 되는 사이라고 욕심내서 정의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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