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물거리는 입들은 어찌나 귀여운지 4살짜리건 1살짜리건 수시로 내게 심장어택을 걸어대는 통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평생 효도는 요맘 때 다 한다지. 이제 더는 바랄 것도 없는 것처럼 본격적으로 아이들과 유희를 시작했다.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의 맹성장으로 생활서비스 전반에서 접근성이 부쩍 높아진 때였다. 소셜커머스 티켓몬스터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인형극장도 호황을 맞았다. 극단들은 서둘러 다양한 주제의 교육컨텐츠를 내놓았고, 나도내 손 안에서말 한마디 없이 인형극과 키즈박람회 참석을 예약할 수 있었다.
이 비약적 발전은 아이들로 하여금 세상을 대표해 여러 사회적 종목들을 가르쳐주었다. 나 역시 시대에 편승해 동서남북 할 것 없이 서울의 어린이 문화를 탐하러 돌아다녔다. 가히 축제기간이었다. 재미, 권성징악 등은 물론 배려, 반성, 사랑 등의 철학적 상식들이 동화처럼 해석되어 아이들을 웃음짓게 했다. 세상은 대에서 대로 물려주는 지혜보다 새롭게 발견한 교육방식으로 육아하는 것을 선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지하지 못한 채 나는 수동적인 육아주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는 내가 직접 아이들의 본보기가 되고자 충분히 노력하지 못했음을 말하며 의지하지 않고서는 스스로 육아기준과 삶의 목표를 세우지 못했음을 반어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겠다고 다짐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흘러가는대로 생각하고 살아지는대로 움직였다. 결혼 초반엔 눈 앞의 일들 때문이라 둘러대고, 엄마가 되고나서는 육아 때문이라 변호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단순히 존재하는 엄마가 아니라 대신 해줄 엄마였기에, 뼛속부터 인식형(P) 인간인 나는 이들의 어린 삶 속에 아예 들어가 앉아 오랫동안 나의 삶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삶에는 남편도, 부모님도, 나의 미래도 있었는데 말이다.
세번째 임신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말로, 덜컥 임신을 '해버린' 것이다.
완벽한 가족이 완성되었다고 자찬하면서도 미래설계를 미루고 육아로 도피했던 나였다. 아니, 육아시절은 고사하고 그보다 훨씬 전의 성의없는 가족계획에서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낳아보니 더 낳고 싶더라는 마음변화는 있었지만, 계획의 변경과는 결이 다를 것이니..
혹자는 살다보면 한 명 더 생길 수도 있는 거지 별놈의 참회를 다 한다 할지도 모르겠다. 이에 덧붙이자면,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 (설령 같은 네 자녀를 양육하더라도) 10년은 더 진보된 삶을 살고 있을텐데 말이다.
참 모순적인 인생이다. 현재는 내 행복의 모든 것이라 말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과거의 비어있던 가치관을 비판하는 판국이라니. 합리화를 위해 내가 내뱉었던 수천억 말들을 되짚어본다. "부루마불 네명 다 있으면 진짜 재밌겠다"같은 것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