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건물에 들어선 집은 구조적으로 독특한 형태가 많았다. 우리 집도 전체적으로 길쭉한 모양에 안방만 넓고 다른 곳들은 좁았는데, 둘째가 생기면서 공간 활용에 한계가 왔었다.
집이 좀 좁으면 어때. 잘 정돈하고 적응하며 지내면 되지. 공간이 부족하다고 이사를 하기에는 환경이 아까운 동네였다. 역세권이고 큰 공원과 시장이 가까이 있으며 보육시설과 학교 등 모든 것이 도보권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전세자금대출도 변제하지 못한 상태로 같은 환경의 더 나은 집을 갈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셋째를 임신하게 된 것이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놀라진 않았다. 사실은 원하던 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기쁘게 맞이했다. 시어머님이 "다음 아이는 남자앤데.."라며 전지하신 적도 있어서 성별확정 전인데도 왠지 처음부터 아들 갖기 위해 임신했다고 착각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셋째는 아들입니다.) 무계획의 산물일 뿐이지만 이를 포장해 줄 것들은 많았다.
어쨌든 이제 이 집에서 세 아이의 양육은 무리지 싶었다. 예산에 맞춰 넓은 집을 가려면 서울을 떠나야만 했다.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서 결정한 이사.
만삭이 될 때까지 때론 지하철을 타고 때론 운전을 하며 경기 남부권의 집들을 보러 오르락내리락했다. 동네를 정하고 후보를 추리고 최종 결정을 하는 것까지 혼자서 했다. 가열한 더위 아래서 대여섯 군데의 가구매장을 다니며 새 가구를 맞추고 이사업체도 컨텍했다.
남편은 이사 당일 집을 처음으로 봤는데, 이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이 모든 것을 내가 진행하는 대로 그냥 두었던건지 모르겠다.(묻진 않았다.) 그래서 남편이 집에 들어선 순간 평가받는 심정이 되어 반응을 살피고 있었는데,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남편이 뒷베란다 밖을 내다보며 외마디 탄성을 지르고는 내게 돌아와 어깨를 두드리며 했던 첫마디, 잘 골랐네 집.
'다행이다!'
뒷베란다로 보이는 산과 시골스러운 경치, 고개를 숙이면 초등학교 등하굣길이 길쭉이 내려다보이고 밤에는 멀찌감치 반짝이는 야경이 펼쳐지며 근처 대학교 축제기간에는 앞베란다로 폭죽놀이를 관람할 수 있는, 이른 아침 때로는 짙은 안개가 내려앉아 구름 위에 떠있는 것 같은, 우리 집은 한적한 마을의 아파트 탑층이었다.
아예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했더니 집도 동네도 모든 게 어색하기만 했다.
출산예정일 한 달 전이어서 마음껏 돌아다녀보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당시 딸 둘의 나이는 7세와 4세. 아파트 도서관에서 열리는 체험활동에 열심히 데리고 다녔고 동네에 여덟 개나 되는 놀이터를 하루에 하나씩 구경하러 다녔다.
출산할 병원을 골라 전원서류를 들고 갔는데 이 동네는 애 셋 정도는 기본인 곳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놀이터가 그렇게 많더라니. 불과 10년 뒤인 지금은 노인 비중이 훨씬 많아졌지만, 당시에는 애엄마들과 임산부를 흔히 만날 수 있었다. 심지어 출산예정일이 같은 산모마저 금방 찾을 수 있었던, 이곳은 적응하기가 참 쉬운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