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생 아들이 다닐 학원에 상담을 가기 전에 새치커버 마스카라로 흰머리를 대충 가렸어요. 엊그제 한 것 같은데 금세 희끗희끗해졌네요. 아이는 다니던 기숙학원을 한 달도 안 돼서 뛰쳐나왔어요. 자신은 공부 체질이 아니라며 차라리 군대를 먼저 가겠다고 하면서요. 아들과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려고 하니 땀 때문인지 반팔 옷소매가 끈적한 스티커처럼 팔에 들러붙습니다. 불쾌지수가 최고조인 건 며칠 째 내리는 장맛비 때문일까요 덥고 찐득한날씨 때문일까요. 선풍기를 강풍으로 바꾸며 몸으로 바짝 당겨봅니다.
'엄마 그렇게 더워?'
'요즘 갱년기라서 그래'
'아이고 엄만 10년째 갱년기야?'
가슴속에서 뜨거운 게 훅 하고 올라오는데 심호흡을 했습니다. '진정하자. 이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니다. 상담받으러 온 스무 살짜리 내담자다' 최면을 걸듯 뇌를 속여보려고 하지만 몸은 정직합니다. 발열조끼라도 입은 것처럼 열감이 느껴지고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2 학원상담실
원장선생님은 상담신청서를 건네면서 작수(작년 수능) 등급, 올해 6모(6월 모의고사 성적) 등을 적으라고 하셨어요. 기숙학원을 뛰쳐나온 것을 듣더니 참고 버티는 힘을 길러야 하겠다고 진지하게 조언하셨죠. 모든 공부 시스템은 수능 시간과 똑같이 적용되며 가장 기본 수칙은 묵언수행이란 걸 강조했습니다. 원장님, 각 교과 선생님들, 조교 외에 그 어떤 사람과도 대화를 하면 벌점이 주어지며, 일정 점수 이상 쌓이면 퇴소조치랍니다. 반수 하는 애들이 많아서 자리가 없는데 직전에 한 명이 퇴소를 당해서 한 자리가 생겼다며 운이 좋다는 말도 덧붙이셨어요.
'어머니가 밝으셔서 그런지 다행히 아이가 에너지가 없진 않네요. 요즘 무기력한 애들이 하도 많아서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영혼 없는 미소로 대충 흘러 넘기려는데 등이 후끈거렸어요. 열파스를 덕지덕지 붙여놓기라도 한 듯. 상담실이 좁아서 그런 건지 가슴마저 답답했죠. 명치끝에 뭔가가 걸려있는 느낌이랄까요. 불현듯 단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한국인의 특정한 질환이라는 이유로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우리말 발음 그대로 표시한 단어. 바로 '화병(Hwa-Byung)'
심리적 문제가 몸의 통증을 유발하는 것을 신체화라고 합니다.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울화가 해소되지 못하고 쌓여서 나타나는 중년기의 대표적인 신체화 증상이 바로 화병(火病)이죠. 지금은 사라졌지만 미국 정신장애진단분류(DSM-Ⅳ)에서 화병을 한국인에게 독특하게 나타나는 민속문화증후군(culture bound syndrome)으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화병의 주요 증상>
억압된 분노와 우울 등 부정적 정서로 인한 가슴통증, 숨쉬기 답답함, 가슴이 뜀, 몸 곳곳에서 알 수 없는 통증, 치밀어 오름, 불면, 비관, 진땀, 후회, 눈물 등
중년 여성은 개인적인 발달 관점에서는 노화에 따른 생물학적 변화를 느끼고, 신체적으로 갱년기와 폐경기를 경험합니다. 가정과 사회에서도 다양한 역할의 변화와 함께 자녀의 독립으로 인한 갈등과 상실감을 겪기도 하죠. 신체적, 정신적 위기를 겪으면서 정체성의 혼란, 공허함과 허무감 등을 느끼며 자신감 상실로 인해 우울이나 불안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스트레스나 억눌린 감정을 적절히 다뤄주지 못하면 심리적인 문제가 생기거나 신체적인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죠. 감정은 마냥 참거나 억압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쑥 화가 치밀거나 짜증이 날 때, 끝도 없는 일에 지쳐서 울고 싶을 때, 마음이 외롭고 슬플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표현하지 못하고 참기만 한 적이 있나요? 오랫동안 감정을 억압하는 바람에 억울함이나 노여움 등이 해소되지 않아서 신체적 증상을 겪고 있다면 이를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힘들거나 답답할 때 마음은 제일 먼저 몸으로 신호를 보내죠. 몸과 마음은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압력밥솥 증기배출구에 이물질 등이 쌓여 김이 잘 빠져나가지 않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증기가 제대로 배출되지 않아 밥솥이 허용하는 압력 수준을 초과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밥솥은 '뻥'하고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감정을 억누르거나 회피하는 것은 압력밥솥의 증기배출구를 틀어막는 것과 같습니다.
하루 중 잠깐이라도 자식, 남편, 부모 등 다른 사람을 챙기고 살피느라 바빴던 시선을 온전히 나에게 돌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귀를 기울이고, 몸이 나타내는 신호에도 관심을 가져 봅시다.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 많이 힘들어. 좀 알아차려 줘'라면서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사당해 여기저기 고장 난 내 몸을 '왜 예전 같지 않냐'며 구박하거나 외면하지는 맙시다. 애쓰고 고생한 내 몸을 다정하게 안아줄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이라면 그건 바로 나 자신입니다. 중년, 스스로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기 딱 좋은 시간입니다.
중년여성을 위한 마음 PT
조용한 곳에서 편안한 자세를 취합니다. 천천히 호흡을 하면서 내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해 봅시다. 신체의 어떤 부위에서 어떤 느낌이 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