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 씨는 대학교 1학년 연년생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작년까지는 첫째가 재수를 하고 둘째가 고3이라 입시 전형이 달라서 두 아이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두 아이 모두 원하던 대학에 합격한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캠퍼스 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입시만 끝나면 걱정 근심도 다 사라지고 편해질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대학생이 된 후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미자 씨는 마음이 헛헛하고 작은 일에도 괜히 짜증이 났죠. 갑자기 울화가 치밀기도 했고요. 예전 같았으면 10점 만점에 2, 3 점 정도로 느꼈을 화가 8, 9점으로 치솟았죠. 사소한 이유로 버럭 하거나 갑자기 우는 일이 잦아지자 미자 씨 스스로도 당황스러웠지만 남편과 아이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봤습니다.
상담실에서 만나는 중년 나이대분들에게 지금 기분이 어떠시냐고 질문하면 당황스러워하면서 ‘글쎄요’ 라거나 ‘그냥 힘들어요.’라고 뭉뚱그려서 대답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유발한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서 만 상세히 얘기할 뿐 내 마음에 대해 표현해 본 적이 드물다고 하시면서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자녀와 남편, 양가 부모님을 챙기느라 자기감정을 돌보지 못하며 살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여성이 많습니다. 자녀의 좋은 성적을 위해 학원을 알아보고 운전기사 노릇을 하고 영양가 있는 매 끼니를 챙겨 먹이느라 마치 매니저처럼 바쁘게만 살아온 것이죠. 남편도 갱년기인지 부쩍 짜증이 늘고, 뭘 좀 의논하려고 하면 ‘당신이 알아서 해’라고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옵니다.
성장하면서 우리는 ‘기왕 할 거 기분 좋게 해’, ‘감정에 신경 쓰지 말고 일단 할 일에 집중해’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들어왔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표현하지 말 것을 암묵적으로 교육받아온 것이죠. 거기에다 여성들 중엔 결혼과 출산 이후 가족들을 챙기기 바빠 내 마음이 어떤지 들여다볼 사이가 없었다는 분이 허다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랫동안 자신의 감정을 바라보지 않고 외면한 결과는 생각보다 가혹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사는 건지 삶의 의미조차 모르겠고, 이성적으로는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은 공허하고 서럽기만 하죠. 몸이 여기저기 안 좋아져서 병원 갈 일이 늘어나는데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늘어난 뱃살과 주름 때문에 거울은 쳐다보기도 싫어집니다. 게다가 폐경기 이후라면 한 번 찐 살이 좀처럼 빠질 생각을 안 합니다.
산전벽해라는 말조차 부족할 정도로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쏟아지는 정보와 변화를 따라잡기 힘들어 바보가 된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우리는 시리, 크로버, 빅스비 같은 똑똑한 인공지능 비서들에게 음성으로 명령을 내리면 바로 서비스를 실행하고 답을 찾아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우리 뇌는 시도 때도 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도파민에 흠뻑 절여진 상태죠. 이런 상황에서 차분히 숨을 고르며 내면을 들여다보고 감정을 탐색하는 게 가능하긴 할까요?
최근에는 대화형 AI(인공지능) 챗GPT가 사람보다 '감정 인식' 능력이 뛰어나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조하르 엘리요셉 이스라엘 맥스스턴 에즈릴밸리대 박사 연구팀은 국제학술지 '심리학 프런티어스'(Frontiers in Psychology)에 이 같은 연구 논문을 게재했습니다.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AI 독거노인 돌봄 서비스는 자신이 설치된 집에 사는 노인이 하는 말까지 탐지합니다 "우울해", "죽고 싶어" 등 부정적 발화가 1주일에 3회 이상 감지되면 AI 돌봄 관제 시스템을 통해 심리 상담이 이뤄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AI가 독거노인 돌봄 서비스를 비롯해서 의료, 업무, 고객대응 등 거의 모든 생활 분야에서 섬뜩할 정도로 인간과 맞먹는 우수성을 선보인다고 해도 내 감정까지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인공지능비서인들 내가 요새 사는 게 왜 이리 헛헛한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 일이 왜 시들해졌는지, 밤에 왜 그렇게 잠이 안 오는지, 내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어찌 다 알 수 있을까요.
잠시 멈춰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봅시다. 최근에 기분이 어떤지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있나요? 힘들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 잠시 숨을 돌리며 마음을 살펴본 적은요?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면 내 마음이 어떤지 마지막으로 살펴본 건 언제인가요?
마음이 지치고 외로울 때 당장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얘기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항상 가능하지 않고 여건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나에겐 24시간 중 아무 때나 얘기를 걸 수 있는 친구가 한 명 있죠. 그건 바로 '나 자신'입니다.
특히나 거센 감정에 압도되는 일이 예전보다 늘어난다면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자기를 봐달라는 신호입니다. 감정이 격해진 이유를 모를 때 자책하거나 비난하기보다는 감정을 알아주는 게 먼저죠. 왜 날 알아주지 않느냐고 타인을 원망하기보다 나 자신부터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를 돌봐줍시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아차리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자기 이해가 시작됩니다. 마음속에서 감정들이 파도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봅시다. 중요한 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비난하거나 탓하지 말고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관찰자와 같은 태도죠.
감정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없으며, 살아있는 한 인간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매일 느끼는 감정이야말로 특정 욕구가 충족됐는지 좌절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정보죠. 그런 의미에서 정서는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가기 위한 내 마음의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감정(emotion)이라는 단어는 원래 밖으로(e-, out) 향하는 일종의 운동(motion)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감정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데이터죠. 예를 들어 공포는 도피하려는 동기를 동반하며, 분노는 공격하려는 동기를 불러일으킵니다.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거나 해소되지 못한 감정으로 인해 부쩍 감정 조절이 어렵다면 감정일기를 써 봅시다. 감정일기는 미처 몰랐던 숨겨진 감정을 알아차리도록 내 마음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그때 떠오른 생각과 감정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답답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일기장 검사를 받은 경험이 있어선지 일기를 쓸 때조차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감정일기를 쓸 때 중요한 것은 내가 느꼈던 것에 대해서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솔직하게 쓰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내가 쓴 글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혹 초라하게 느껴질지라도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생각을 사실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는데 감정일기를 쓰면서 사실(상황)과 생각을 구분하는 연습을 해볼 수 있습니다. 특정 상황에서 어떤 생각(해석이나 판단)으로 인해 부정적 감정이 증폭되는지 한 번 살펴봅시다. 얽힌 실타래처럼 복잡한 마음을 한 가닥씩 풀면서 정리하노라면 상황이 보다 명료해지고 감정 뒤에 감춰진 욕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감정일기를 꾸준히 쓰다 보면비슷한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감정과 생각(신념·믿음), 행동 패턴이 드러납니다. 감정을 알아차리고 한 발짝 떨어져 살펴보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거나 감정에 휩싸이는 대신 나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 대해 균형 잡힌 관점과 함께 현명하게 대응할 수 있는 마음의 힘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감정일기를 쓰는 최고의 장점은 자신과 일대일로 깊이 있게 만남으로써 더욱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중년 여성을 위한 마음 PT
[감정일기]
날짜 : 년 월 일
하루를 마치며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을 찾아서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만들어주세요. 아침에 눈을 떠서 지금까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떠올려봅시다.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감정들이 있었다면 판단하지 말고 느껴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상황: 오늘 하루 중 평소보다 더 강한 감정을 느꼈다거나 기억나는 순간이 있나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표정은 어땠는지 떠올려 보면서 해당 상황을 설명해 보세요. (언제/어디서/무엇을/어떻게/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