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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든쌤 Jul 29. 2024

'집'에 대한 기억은 슬픔에 바르는 빨간약이다

어린 시절 살던 집의 평면도를 그려보자


지끈지끈한 편두통에 시달리던 어느 봄날, 타이레놀을 한 알 삼키고 산책을 나섰다. 그래 매번 가던 길 말고 모르는 길로 한 번 가보자. ‘지구는 둥~~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을 흥얼거리면서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빼곡한 아파트촌을 지나자 낡은 주택가와 구불구불 골목길이 나타났다. 나지막한 담장 위 올망졸망한 화분들, 아무나 드나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삐죽 열린 파란 대문, 나른한 고양이의 표정, 평상 위에서 장기를 두는 어르신들. 공기마저 평화롭다는 게 이런 걸까. 어느 2층 양옥집 베란다에 놓인 항아리를 바라보노라니 어린 시절 살던 신림동 집 장독대가 떠올랐다. 그리고 보니 어디선가 구수한 장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기억은 약국과도 같아서 때로는 진통제를, 때로는 독약을 꺼낼 수 있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위 문장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나에겐 어린 시절 기억이 진통제 쪽에 가까웠나 보다. 두통 때문에 찡그렸던 표정 대신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보면 유년시절 기억 속에는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무궁무진한 보물 창고가 존재한다.(많이 맞았던 것을 제외하면)


ⓒ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포스터


이를 테면 나는 ‘늠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우리 집 진돗개 두기의 표정에서 배웠다. 녀석의 이름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 방영했던 인기 미드 '천재소년 두기'를 본 따서 지었다. 옛날 집 마당 한쪽엔 시멘트로 지어진 높은 쓰레기통이 있었고 두기는 그 위에 올라가 앞다리를 담벼락에 걸친 채 밖을 내다보던 버릇이 있었다. 민첩하고 영리했으며 늠름하게 잘생긴 진돗개가 우리 개라는 사실이 내심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당시 우리가 살던 집은 일반 주택으로 내가 일곱 살 때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손수 벽돌을 깔아서 진입로를 만드시던 기억이 난다. 길 양쪽으로 잔디가 소박하게 깔렸고 마당 한편에는 목련꽃이 컴컴한 밤을 새하얗게 밝혔다.


앨범에서 꺼낸 신림동 집 장독대 사진


해마다 초겨울 무렵 김장김치를 김장독에 꽉 채워두는 건 중요한 겨우살이 준비 중 하나였다. 김치가 익어갈 무렵 함박눈이 펑펑 내리면 온 세상이 하얘지고 마음은 뽀득뽀득 개운해졌다. 눈이 두텁게 쌓이면 진돗개 두기도 이때만큼은 진중한 몸가짐을 포기하고 짓궂은 발자국을 온 사방에 찍어댔다.


빠글빠글한 파마머리를 한 엄마가 땅에 묻어둔 항아리 뚜껑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스테인리스 대접에 김치를 포기 째 담아 오면 비로소 진짜 겨울이 된 것 같았다. 간혹 새하얗게 쌓인 눈 위로 빨간 김치 국물이 한 두 방울쯤 떨어지곤 했는데 우리 집 마당의 겨울 시그니처 풍경이었다. 엄마는 음식 솜씨가 비교적 없는 편이셨는데 김치만은 시원하고 맛있었다. 나무 도마에 썰어둔 포기김치를 통에 담기 전 잽싸게 집어먹는 배추의 식감은 얼마나 싱싱하고 아삭거렸던가. 귤을 까먹으며 라디오에서 나오는 영국 팝 듀오 왬(wham)의 'Wake Me Up Before You Go-Go'나 3인조 밴드 아하(A-ha)의 'Take On Me'를 따라 부르곤 했었다.


8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다들 겪었겠지만 체벌이 밥 먹듯 자행하던 시절이었다. 학교에 가면 성별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온갖 이유로 두들겨 맞는 게 흔하디 흔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각 과목 선생님별로 체벌 스타일이 달랐다. 책상 위에 무릎 꿇고 앉아서 박달나무 몽둥이로 허벅지를 맞거나, 30센티 자를 세로로 세워 뼈까지 아플 정도로 손바닥을 맞거나,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거나. 한 번은 쉬는 시간 끝났는지 모르고 서 있던 네댓 명 중에 나도 포함됐고 서 있던 사람 모두 칠판 앞으로 불려 나갔다. 엎드려뻗쳐를 하고 사회선생님한테 엉덩이를 여러 대 맞았는데 이렇게 맞으면 살이 터지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2 때 반 친구 두 명이 싸우다 걸려서 교탁 앞으로 불려 나갔는데 수학선생님이 느닷없이 출석부로 얼굴을 마구 가격하는 일도 있었다. 당사자가 아닌데도 수치심과 모멸감, 공포에 휨 싸였던 기억이 난다.

언니와 내가 같이 쓰던 방은 겨울에 외풍이 심해서 점퍼를 껴입지 않고는 못 배겼지만 바깥에서 받은 그 모든 상처와 체벌을 잠시나마 차단해 주는 안전지대였다.


어느 해인가 부엌 천장이 무너졌던 사건도 있었다. 동네 주민이 빌라를 지으려고 일반 주택 한 채를 부쉈고 그 집 지하실에 숨어 살던 길고양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언제부터였는지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집 다락에도 야옹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평일, 시간은 대략 오후 서 너 시쯤이었나. 엄마와 언니, 내가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데 느닷없이 부엌천장이 와르르 무너졌고 동시에 뭔가가 쿵하고 떨어졌다. 다락방에 숨어 살던 바로 그 고양이었다. 찰나였지만 녀석과 눈이 마주쳤는데 어찌나 눈빛이 황망하던지. 후다닥 도망가던 당황스러운 뒷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앨범에서 꺼낸 옛날 집 사진


대학교 2학년 때 유년시절을 통으로 함께 한 일층 양옥집을 떠난 후론 쭉 아파트에서 살았다. 내 인생을 한 권의 사람책으로 쓰자면 그 집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갈 때 한 챕터가 끝난 셈이다.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고 결혼과 출산을 하면서 이사를 몇 번 더 했지만 신림동 집만큼 내 삶의 한 시절을 애틋하게 지켜봐 준 곳은 없다. 물리적인 집은 사라지고 그곳엔 신축빌라가 들어섰지만 집에 대한 이미지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마음속에 생생하게 존재한다.

과학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인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의 이미지는 우리들의 내밀한 존재의 지형도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은 과거의 나와 나를 둘러싼 공간에 대한 기억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기제다. 


집이라고 하면 요즘 같아선 투자나 재테크 수단을 떠올리기 쉽지만 원래 장소에 대한 기억에는 거기서 경험한 온갖 다채로운 정서가 함축돼 있다. 집에 대한 기억은 단순히 ‘공간’이라는 물리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그 시절 우리의 일상과 습관, 규칙, 함께 먹던 음식, 즐겨 듣던 노래, 좋아하던 책, 자주 느꼈던 감정까지 다 불러일으키는 마법을 부리곤 한다. 그런 까닭인지 알라이다 아스만은『기억의 공간』에서 장소를 문화적 기억의 매체 중 하나로 일컫기도 했다.


지금의 나 보다 훨씬 어렸던, 그 시절 젊디 젊은 부모님은 어느새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셨다. 아동문학가가 되겠다던 장래희망, 순수함, 꿈, 동심 같이 반짝거리던 것들도 내 안에서 하나둘씩 다 사라져 갔다. 집에 대한 행복한 기억은 사라진 소중한 것들에 대한 상실과 슬픔에 바르는 빨간약이다. 그 집에서 우리 가족은 추위와 더위, 비바람을 피했고, 수 없이 많은 끼니를 함께 했으며  밤이면 지친 몸을 누였다. 울고 웃고 싸우고 복닥거리던 우리 삼 남매는 그렇게 조금씩 자라 어느새 중년이 됐다.


       



<중년 여성을 위한 마음 PT>

 

 어릴 적 살던 집을 떠올려 보고 그 집의 평면도를 그려봅시다. 앨범 속 사진을 보면 각 공간의 배치를 복원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집에서 누구와 함께 살았나요?   




거기에서 사는 동안 주로 느껴지는 분위기는 어땠나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은 어디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집에서 주로 무엇을 했나요?




내가 좋아하거나 나에게 중요했던 공간은 어디였나요? 그 이유를 적어보세요.




그 집에서 사는 동안 경험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그것이 내가 발달하고 성장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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