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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날 Jun 24. 2024

지속 가능한 팜유를 위한 노력

이상과 현실

팜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늘 따라오는 이야기가 환경 파괴, 특히 '열대 우림 파괴'입니다. 앞선 글에서 1헥타르당 팜유는 3톤 정도가 생산되고, 다른 식물성 유지들은 1톤이 채 생산되지 않는다고 했는데요. 이렇게 생각하면 팜유가 가장 지구를 덜 개발하면서 많은 식물성 유지를 생산해 내니, 오히려 더 환경 친화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팜유를 생산하기 위해 개간하는 열대우림 1헥타르와 대두, 유채, 해바라기 등을 재배하기 위한 1헥타르의 생태적인 가치는 다를 수 있습니다. 열대우림에는 수많은 멸종 위기 생물들이 살고 있고, 팜농장 개발은 이러한 생물들의 삶의 터전을 뺏어 생태계 다양성을 해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팜농장 개발은 세계적인 멸종 위기종인 오랑우탄의 서식지를 빼앗는다며 오랫동안 환경 보호단체로부터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생태계 다양성 외에도, 팜농장 개발은 높은 생태적 가치를 지닌 이탄지대(Peatland)를 훼손한다는 측면에서도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이탄지대는 식물 잔해가 침수된 상태에서 완전히 분해되지 못하고 오랜 기간 퇴적된 습지인데, 일반 토양보다 훨씬 더 많은 탄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이렇게 탄소를 많이 머금은 땅을 개발하는 것, 쉽게 말해 흙을 삽으로 파내서 뒤집는 것은, 땅 속 탄소가 공기 중으로 날아가 대기오염과 지구온난화의 심각한 원인이 됩니다. 최근에는 규제가 강화되었지만, 과거에 인도네시아의 많은 팜농장들이 이탄지대를 개발해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아래 지도는 세계 이탄지대 현황을 보여줍니다. 지도를 보면 초록색 네모로 표시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지역에 이탄지대가 많이 분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 이탄지대 현황 (출처: UN environment programme)



이런 환경 문제들로 인해, 특히 유럽 사회를 중심으로 '팜유 퇴출 운동'이 일어나고 국제적인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EU는 인도, 중국에 이어 팜유를 3번째로 많이 수입하지만, 2019년 전후를 정점으로 수입량이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팜유를 완전히 '퇴출'한다면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팜유는 압도적인 생산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른 식물성 유지로 대체하려면 훨씬 더 많은 땅을 필요로 하고, 이는 더 큰 환경 파괴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렴하고 생산성이 높은 팜유의 공급이 중단된다면 식량 가격을 포함한 물가의 급등과 같은 경제문제까지 야기할 것입니다.


세계 주요 팜유 생산국들 중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의 개발도상국이 많습니다. 노동 집약적인 팜사업은 이런 나라들에서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냅니다. 특히 팜농장이 개발되는 열대림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대부분 ‘절대 빈곤’입니다. 팜사업은 이런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절대 빈곤 문제를 해결하며 지역사회를 발전시키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노동 집약적인 팜사업. 팜열매를 운반하는 모습 (본인 촬영)


팜사업을 하면서 인도네시아의 팜농장을 자주 방문하게 되는데, 팜농장이 있는 인근 지역들은 1년이 다르게 발전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재작년 출장 때 진흙길로 지나갔던 곳이 작년엔 팜유나 열매 운송을 위해 시멘트 도로로 개발되고, 올해엔 아스팔트 도로로 개발돼 있습니다. 허허벌판에 좌판 밖에 없는, 시골 마을 같았던 도시들에 쇼핑몰이 생기고 문화 시설이 생기고 호텔이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 한국에서는 10년은 돼야 느낄 수 있을만한 격세지감을 1, 2년 단위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EU의 팜유 퇴출 주장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너네들은 예전에 환경파괴 다 해서 경제발전 이루고 이제 잘 살잖아. 우리도 잘 살고 싶어.”


팜유 생산국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면 나라 경제를 부흥시키고 국민들을 절대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싶은데 환경 이슈를 명목으로 팜사업을 무조건 공격한다면 충분히 불공평함을 느끼고 반발감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무분별하게 열대 우림을 개발한다면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환경을 파괴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환경 보호를 주장하는 쪽도, 빈곤을 퇴치하고 부를 늘리고 싶은 쪽도 모두 합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민과 갈등 끝에 현시점에서 가장 가깝게 절충안에 이른 것은 환경, 지역사회, 준법 등 측면에서 지속 가능한 팜유를 사용하자는 움직임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친환경 팜유 국제 인증인 RSPO(Roundtable on Sustainable Palm Oil)가 있습니다.


RSPO 마크와 RSPO의 설립 멤버 (출처: RSPO 홈페이지)


RSPO는 100여 개국 이상에 5백만 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한 세계 자연 기금(WWF)과 말레이시아 팜유 협회를 필두로 세워진 비영리단체로, 아래와 같은 기준을 충족한 팜농장에게 친환경 팜유 인증을 부여합니다.

- 경영 상의 투명성, 준법성, 생산 효율성

- 노동 인권, 지역사회 영향력

- 온실가스 배출, 이탄지대 신규 식재 및 화전 금지, 고 보존 가치 구역의 보호 등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 인증을 받은 팜유 생산, 유통 사업자는 이러한 인증을 요구하는 많은 글로벌 기업들(팜유 수요자)에게 친환경 인증 팜유를 판매합니다. 인도네시아에 팜농장을 보유하고 있는, 종합상사를 포함한 우리나라 회사들 역시 RSPO 인증을 취득했거나 취득하기 위한 절차에 착수했습니다.


RSPO 친환경 팜유 인증을 받으면, 인증 없이 생산된 팜유보다 더 높은 가격을 받습니다. 소위 친환경 프리미엄인데요. 이런 RSPO 인증 방식은 IP(Identity Preserved), SG(Segregated), MB(Mass Balance), BC(Book & Claim)과 같은 4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IP 방식은 RSPO 인증을 받은 하나의 팜원유 공장에서 만들어진 팜유에 인증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5,000톤의 팜유가 RSPO IP 인증을 받았다면, 이 5,000톤 모두 RSPO 인증을 받은 하나의 공장에서 나왔다는 뜻입니다. 팜유의 인증에 대해 추적을 할 때에도 하나의 공장만 추적하면 되는 가장 깔끔한 모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SG 방식은 인증을 받은 여러 팜원유 공장에서 만들어진 팜유에 인증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5,000톤의 팜유가 RSPO 인증을 받은 3개의 공장에서 각각 2,000톤, 2,000톤, 1,000톤씩 만들어졌을 때 RSPO 인증을 부여하는 방식입니다.


MB 방식은 RSPO 인증을 받은 팜원유 공장과 받지 않은 팜원유 공장에서 나온 팜유가 섞여 있을 때 인증을 부여하는 방식입니다. 5,000톤의 팜유 중 RSPO 인증을 받은 공장에서 만든 것이 3,000톤, 인증받지 않은 곳에서 만든 팜유가 2,000톤이라면, 5,000톤 중 3,000톤만 RSPO 인증을 해주는 것입니다. 물류 상황 등에 따라 인증 팜유와 비인증 팜유가 물리적으로 혼합될 때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위의 방식들을 활용한 RSPO 인증 팜유는 시장에서 거래될 때 친환경 프리미엄을 받을 수도 있고, 인증받았다는 credit을 탄소배출권처럼 거래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BC 방식입니다. RSPO 인증 농장/공장이 만든 팜유는 RSPO 인증 팜유가 되는데, 인증받은 농장/공장이 자신의 팜유에서 'RSPO 인증 마크를 떼어내서' 따로 credit으로 팔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credit 판매자는 수익을 얻지만 실제 생산한 RSPO 인증 팜유에서는 인증 마크를 떼어낸 셈이니, Non-RSPO(비 인증)로 판매됩니다. 반대로 credit을 구매한 사업자는 실제로는 Non-RSPO인 팜유로 만든 제품도 RSPO 인증 제품으로 판매할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같은 RSPO 인증이라도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출처: RSPO rules on market communications and claims 2022)


위 그림은 RSPO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RSPO 인증 방식별 라벨링입니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CERTIFIED, MIXED, CREDITS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 RSPO 인증 팜유를 조달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RSPO와 같은 국제 인증 외에도 ISPO(Indonesian Sustainable Palm Oil), MSPO(Malaysian Sustainable Palm Oil) 등이 있고 이런 환경 인증들이 없으면 점점 사업을 하기 힘들어지는 환경이 되고 있습니다. 소비자들의 기대치가 높은 대기업(유니레버, 네슬레 등)에 팜유를 판매하기 어려워지거나, 팜사업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금융 심사가 까다로워질 수 있습니다. 특히 팜사업을 하는 대기업의 경우, 팜사업의 환경 이슈 때문에 해당 대기업 전체의 신용도에 지장이 생기게 되면 팜사업 외에 다른 사업에도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각별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트렌드에 힘입어 심사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한 준비 과정을 도와주는 컨설팅 역시 하나의 비즈니스로 떠올랐을 정도입니다.


환경 파괴 우려와 현실성이라는 고민 가운데 나온 이러한 인증 제도가 정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앞으로 늘어날 인구와 수요에 반해 지구에 농사지을 땅은 제한돼 있고 그것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환경 파괴가 수반된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고민은 끝없이 풀어가야 할 숙제가 될 것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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