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편들을 놓고 흐느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온 삶이 눈물을 요구하는 것을.
아들 메틸리우스가 죽어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마르키아에게 전하는 세네카의 메시지다.
회사에서 내가 맡은 업무에 노력과 정성을 쏟는데도 불구하고, 외부의 무언가로 인해 가로막힌 상황—특히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상황일 때—을 맞이할 때, 나는 분노를 느꼈다. 분노라는 감정 하나로 표현하기에는 좀 아쉽다. 더 복잡한 감정들의 집합체였다. 분노, 좌절, 서운함, 슬픔, 원통하고 억울함이 뒤섞여 있었고, 눈물이 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외로움까지 느꼈다.(회사에서 이 정도까지 감정을 느낄 필요가 있나 싶겠지만, 분명 공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 내 업무를 가장 잘 알고 애정을 쏟는 사람이 나이기에 그럴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던 것 같다. 글을 쓰면서 나를 더 파헤쳐 보건대, 열심히 하려는 사람의 사기를 꺾는 곳이라며 외부의 탓을 하면서 나를 피해자로 정했고, 어느새 내 업무에서 느끼던 활기와 보람이 차지할 공간이 내 마음에서 점점 사라져갔다.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굴레에 갇힌 내가 보인다.
나는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었다. 여기에서 몰입은 긍정적인 의미라기보다는, 나 자신에게만 향한 시선의 한계—일종의 아둔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는 자기비하가 아니다. 단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인식의 한계를 지닌 채 세상을 바라본 수많은 순간 중 하나일 뿐이다.
이제는 더 성장한 내가 말할 수 있다.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지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서 행하는 슬기로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가능성을 펼치며 얻는 진정한 자유,
이를 인식하고 실천의 의지를 묵묵히 수행하는 단단함.
이 필요하다고.
이제는 분노, 좌절, 서운함, 슬픔, 원통하고 억울하고, 심지어 외로움까지 느낄 필요가 없다고.
아—! 과거의 내가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내어 스스로를 위로했을 때 보다 비교할 수 없이 든든하다.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현실을 자유롭게 만들어갈 수 있는 상황과, 변화 불가능한 현실을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상황을 올바르게 구분하는 것이 바로 지혜라고 세네카가 말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철학의 위안, 알랭 드 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