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창을 닫음과 동시에 만남이 끝나면, 내 앞에 놓인 노트북 화면, 책, 책상 위의 용품들, 창 밖의 풍경, 햇빛….
사물이든 풍경이든 내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그렇게 다가온 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느껴지고, 내 몸과 정신은 더욱 생기 넘치는 감각을 경험한다.
세상은 바라보고 알아갈 것들로 찬 곳이 되어 다가온다.
독서모임에서 니체의 『우상의 황혼』 중 '독일인에게 부족한 것'에 대한 내용을 들었다. 이는 내가 앞서 경험한 것과 맞닿아, '이렇게 바라보고 알아간다면 좋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특별하게 다가왔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
눈에는 휴식, 인내, 사물이 다가오도록 놔두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판단을 유보하고 개개의 경우를 모든 면에서 살펴보고 이것을 포괄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중략) 모든 문을 열어두는 것, 모든 사소한 사실 앞에서도 공손히 굽실거리는 것, 언제든지 타인이나 사물 안으로 들어가고,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딱따구리 이야기가 나왔다.
마당에 있는 나무에 걸린 해먹에 누워 7080 음악을 들으며 쉬려고 했는데, 갑자기 딱따구리가 "딱딱 딱딱—".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잠시 쉬고 싶어 나온 나를 방해하는 줄도 모르고, 딱따구리는 계속 "딱딱 딱딱—".
7080 음악도, 쉬려던 마음도 저만치 가고 그 녀석이 나를 움직이게 하더니 사진까지 찍게 했다. 어느새 나는 딱따구리에 푹 빠져 있었다.
"그게 일탈일까? 해야 할 일을 미룬 건지, 아니면 그럼에도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가고 있는 건지... 일탈인지 방황인지는 자기 자신만이 안다."
해야 하는 일을 미루는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중, 갑자기 특별한 경험을 했다. 내가 앉아 있는 공간 전체가 줌아웃되는 듯했고, 마치 저 멀리서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모니터 너머로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 표정은 흥미롭고 재미있어 보였으며, 동시에 이야기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생각하는 듯했다.
예전의 나는 갈망이 강했다. 원하는 것, 이루고 싶은 것, 달성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몸과 정신에 힘을 주고 그것 만을 좇았다. 내가 몰두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주변에는 집중력이 좋고 목표를 성취하고 결과를 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 또한 그런 줄로 착각하기도 했지만, 사실 나는 온몸과 마음과 정신에 힘을 준 채로 쫓는 것만을 응시했다.
예전의 내 에너지는 다른 것을 받아들일 여유 없이 굳어 뻣뻣해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내 안에 틈이 생기는 것 같다. 놓아주고, 기다리고, 가만히 바라보고, 흘려보내는 — 이런 새로운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인다. 가장 중요한 건, 이런 변화된 내가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글을 쓰다가 내 마음이 글로 표현되지 않는 순간이 오면, 억지로 붙잡지 않고 그냥 놓아버린다. 대신 창 밖을 구경하거나, 거실을 천천히 걸으며 발바닥의 감각을 느낀다. 창문을 열어 시원한 바람을 맞기도 하고, 빵을 데워 따뜻하고 맛있게 먹기도 한다.
책을 읽다가 내용이 와닿지 않고 '지금 글자만 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잠시 멈추고 일어난다.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다 보면, 그동안 읽었던 책들이 다시 마음속으로 돌아와 내면에 머무르고 새로운 생각이 샘솟기도 한다. 평소 고민했던 답을 찾기도 하고, 새로운 고민이 생기기도 한다.
지난 주말에는 '주말에도 시간 맞춰 일어나 습관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았다. 해야 한다고 여기던 것을 하지 않는 경험이 낯설어서, 내 마음은 불편함과 편안함 사이를 오갔다. 하지만 결국 평정을 찾았고, 이 과정에서 당위성을 깨는 것—그리고 그것이 괜찮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렇게 '여유'라는 것을 알아간다. 놓음이 가짐으로, 느슨함이 채워짐으로 변하는 것을.
전체적인 내 모습이 보인 "줌 아웃"의 경험과 경직되었던 내가 경험한 "여유"를 바탕으로, 니체가 말한 "보는 법"을 실천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