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모두 성장한 뒤 지금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을 참 좋아했어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양 볼이 통통하고 불그스름 한 편이어서 별명이 호빵맨이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선생님께서 내주셨던 수행평가를 특히 좋아했어요.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을 정도면 정말 많이 좋아했나 봅니다.
어느 봄날,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벚꽃 나무 사진을 우리 반 인원수에 맞춰 잔뜩 프린트해 오셨는데, 그 화사하고 아름다운 색이 봄의 색인가 싶어 한참을 바라보았던 기억도 나네요.
그 프린트 속에 벚꽃 나무, 아니 봄의 색을 적당한 크기로 오려서 노트 한쪽에 붙였습니다. 그리곤 우리 주변에 있는 봄에 대해 글로 썼어요. 오려 붙인 건 벚꽃 나무였는데, 저는 목련에 대해서 적었답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내 주신 글감은 지금으로부터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 내 모습을 그려 보고 글로 쓰는 거였어요. 중3 소녀에게 10년 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스물일곱 살에 결혼을 할 것이고, 나이 마흔에 죽고 싶다고 썼던 기억이 납니다. 결혼은 할 것인데 아이에 대해 쓴 기억은 나질 않는 걸 보니 아마도 딩크족이 되고 싶었나 봅니다.
그런 제가 정말로 27살에 결혼을 했어요. 조금 무서워지지 않나요? 다행히 지금 나이 마흔을 넘겼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땐 자고 일어나면 점점 더 기울어 가는 집안 사정이 눈에 보이고, 가난이 온몸으로 느껴질 때였기에 그랬나 봅니다. 어린 내가 보아도 희망이 없다 생각했을 정도였으니, 오래 살만큼 행복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열여섯 아이에게는 마흔이라는 나이가 정말 너무나도 먼 날이고, 너무나도 큰 숫자여서 살만큼(?) 산 나이가 아닐까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미리 밝혀 두자면 지금은 100세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인 여성 평균 수명만큼은 지키고 싶고, 건강하게 나이 들고 싶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다시 16살 소녀가 썼던 글로 돌아가면, 27살에 결혼은 하고 싶지만 아이는 갖고 싶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그런 제게 아들만 둘입니다. 그렇게 엄마로 불린 지도 벌써 십수 년이 다시 흘렀답니다.
코로나 19가 기승이었던 때 엄마로 아이 둘을 24시간 돌보는 것 외에 숨 쉴 구멍이 없었어요. 모든 엄마들이 그랬겠지만, 돌발돌밥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돌기 시작했지요. 밥은 먹기만 하면 끝이 아니잖아요? 재료 구입부터 다듬기, 요리, 잘 안 먹는 애들 살살 달래서 먹이기, 먹고 나면 치우기 과정도 있죠. 아무튼 그 돌밥돌밥이 정말 미치게 벗어나고 싶은 날이 있었어요.
그런 날엔 설거지고 뭐고 그냥 다 내 버려두고 책부터 펼쳤어요. 책으로 도망치 듯 가 버리면 조금은 살만해졌거든요.
그렇게 파고들어 갔던 책이라는 굴 속에서 어떤 한 질문을 마주했어요.
10년 후 당신은
어떤 모습인가요?
중학교 때 수행평가 글쓰기를 했던 것처럼 마흔을 앞두었던 그때 다시 10년 뒤를 상상하게 된 거였어요.
지금으로부터 10년 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10년 뒤 내 모습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이들이 몇 살일까? 하는 거였어요. 엄마라는 게 팍팍 티가 나는 대목입니다.
10년 뒤면 내 나이는 쉰에 가까워졌을 테고, 큰 아이는 성인이 되어 있을 것이고, 둘째는 고등학생이 되어 있겠더라고요. 그때 되면 지금은 “엄마 엄마~” 하고 하루에도 몇 십 번 아니 몇 백번씩 부르지만 그땐 제가 아이들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만큼 제 품과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겠지요.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당연히 그럴 거라고 자주 생각하고 다독이지만 막상 그때가 오면 서운하긴 할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도 지금처럼 내가 아닌 가족만을 바라보고 우선시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좋은 엄마가 아이들을 위해 모두 희생하는 엄마가 아니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고요. 자신들의 행복과 성공만을 바라면서 자신들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온 엄마의 삶을 아이들이 이해하기보단 답답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부담스러워서 괜히 엄마와 거리를 두고 싶어 질지도 모르죠.
제가 원하는 건 엄마로서만이 아닌 그저 나 한 사람으로서 성장해 나의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는 건강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아이들도 부모에게 기대지 않고, 부모 역시 아이들에게 기대하지 않는 것. 그게 제가 바라는 10년 뒤 모습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내내 조금은 우울해지고 말았어요. 지금의 내 모습은 그저 평범한, 아니 평범 이하의 주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경력이 단절된 지 10년이 훌쩍 넘었고, 내 능력을 가지고 돈 벌어 본 경험도 부족한 데다 인맥도 완전히 끊어졌으니까요. 게다가 이젠 할 말도 잘 기억이 안 나서 한참을 버벅 거리는데 10년 뒤 상상 속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의 거리는 서울과 부산, 아니 지구와 태양만큼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그때면 아이들이 모두 성장했을 테고 더 이상은 제 도움이 많이 필요하지 않을 텐데요? 지금처럼 어지르는 일도 덜해지고, 밥도 밖에서 자주 먹게 될 테니 살림할 것도 줄어들겠죠. 그렇다면 나는 나의 쓸모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답답하고, 또 조금은 불안한 마음에 이것저것 해 보기 시작합니다. 요즘 핫하다는 재테크 책도 읽고, 직업 선택에 유리하다는 자격증 취득에도 기웃거려 보고요. 시간 날 때마다 유튜브에 접속해서 재테크 공부에도 열을 올려 봅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그때그때의 불안감을 잠시잠깐 해소해 줄 뿐, 근본적으로 내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했어요. 금방 시들해지는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만 더 키웠을 뿐이었답니다.
10년 후 내가 되고자 하는 내 모습, 내 일을 가지고 아이들과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될 수 있을까요? 엄마로 지낸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가족들에게도 자랑스럽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나 자신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신뢰를 갖고 싶은데 말이죠.
10년 뒤에는 엄마만이 아닌, 나라는 사람으로 좀 더 인정받고 싶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