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 때까진 늘 첫째 줄에-’로 시작되는 델리스파이스 고백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건 나만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이 글을 읽는 분들이라면, 이 노래를 듣고 떠오르는 고백의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나처럼 찌질하고, 아름답지는 못할 테지.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추억은 그렇게 특별한 법이니까.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아! 초등학교 때 첫사랑부터 시작해야 하나? 누군가를 좋아하면 일단 고백을 하고 보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떠오르는 고백의 장면이 한둘이 아니다.
작은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을 사기 위해 한 푼 두 푼 모았던 기억, 그걸 곱게 포장해 학교 후문에서 고백했던 일도 있었지.
버스 정류장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좀 더 찌질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 걸 택하기로 한다. 작은 언덕길을 내려와 걸어 다녔던 학교에서 졸업해, 단발머리를 찰랑 거리며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시절에 당도했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서 있으면 저 멀리서 남학생 한 명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어느 학교 교복인지 아직 헷갈릴 때라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학생은 아닌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짧은 머리임에도 불구하고, 한쪽 머리를 내려 빗어서 눈을 살짝 가린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엄청 촌스러운 헤어 스타일 같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조차도 멋져 보였다. 키가 많이 크진 않았지만 마른 몸에 다리가 긴 편이어서 교복이 참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기 때문에 눈은 컸는지, 피부색이 어떠했는지 그런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전체적으로 느낌이 좋았다는 기억만 남아 있다.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던 이유는 너 무 떨려서도 있지만, 실은 내 모습이 너무 못생긴 것 같아서였다. 얼굴은 잔뜩 그을려 까맣고, 귀 밑으로 짧게 자른 단발머리는 촌스럽고, 3년 내내 입기 위해 크게 산 교복은 엄마 옷을 훔쳐 입은 것처럼 헐렁 거렸으며 입학 전부터 급격하게 오르기 시작한 볼살은 아무리 꼬집어도 갸름해지지 않았다. 못생긴 치아를 감추느라 입을 앙 다물었고, 억지로 다문 입술은 툭 튀어나왔는데, 마치 화가 잔뜩 난 금붕어 같았다.
느낌이 좋은 그 오빠를 쳐다보고 싶지만 이런 내 모습이 자신 없었던 탓에 멀리서 올 때부터 이미 그 사람이 온다는 걸 알았지만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곁눈질로 슬쩍 보고 고개를 떨군 채 얼굴만 붉혔더랬다.
그때부터 나는 이름도 모르고 학교도 어딘지 제대로 모르는 그 오빠에게 매일 편지를 썼다. 어쩌다 예쁜 편지지가 생기면 거기에 썼고, 직접 만들어 쓰기도 했다.
전하지 못한 편지가 하나 둘 쌓여 책처럼 두꺼워졌다.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나갔지만, 그 오빠는 어쩌다 한 번씩 마주칠 수 있었고, 버스가 도착할 즈음 아슬아슬 올라타는 경우가 많아서 타이밍을 잡기 어려웠다.
한 통, 두 통, 편지는 더욱 두꺼워졌고, 그 편지들은 언젠가 기회를 엿봐 전달하겠다는 마음과 함께 고무줄로 묶인 채로 늘 대기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기회가 찾아왔다.
시간이 맞아 함께 버스를 타더라도 내가 늘 최대한 먼 곳으로 가서 사람들 사이에 몸을 숨기곤 했다. 그렇지만 그날은 버스 안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그 오빠 바로 뒤에 서게 되었다.
심장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올까 조심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살짝살짝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뒤 돌아보던 때, 내 눈에 무언가가 포착됐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 오빠의 가방이 반쯤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심장 소리가 거세지다 못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지금이 기회야 지금 아니면 절대 줄 수 없을 거야’ 결심에 결심을 했지만 도무지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가방을 앞으로 돌려 메고 가방 속에 있는 편지 꾸러미를 손으로 만지작 거리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앞으로 두 정거장, 나는 두 정거장만 있으면 내려야 하는데.
두툼한 편지 꾸러미를 드디어 가방에서 건져 올렸다. 그리고 내리러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틀었고, 열린 가방 틈 사이로 편지를 밀어 넣었다. 그러고야 말았다. 기어이.
다음엔 어떻게 되었냐고? 묻지 마시라. 그 이후로 그 오빠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었으니까. 내가 몇 시 몇 분에 버스 함께 타는 무슨 중학교 여학생이라고 단서를 남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그 시간에 절대 나오지 않더라. 윽 정말 생각만 해도 손발이 모두 오그라 들고 마는 찌질한 고백의 역사다.
중학교 때의 짧은 짝사랑과 고백은 막을 내렸다. 답장을 기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 편지를 받은 오빠가 ‘실은 나도 너 좋아했어’라고 고백하길 매일 상상하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백의 기억은 슬프고 안타까운 기억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히려 나에게는 정말 아름답고도 감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뭘 좋아할까. 집에선 무엇을 할까. 상상하고, 혹여나 나의 고백이 성공해 커플로 이어지면 이런 데이트를 하지 않을까. 어떻게 고백을 해 볼까? 온갖 상상을 하며 그려 보았던 시간 동안만큼은 가난한 집 1남 3녀 장녀가 아닐 수 있었다.
그 오빠를 떠올리며 설레는 시간만큼은 학교에 낼 수업료 걱정도 내일 버스비 걱정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그저 14살의 어리고, 순수하고, 수줍은 소녀가 될 수 있었다.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고, 현실에 대한 자각 없이 꿈꿀 수 있었으니까. 머리로 쓰는 연애 소설이 나에게 있어서는 특효약이나 다름없었다. 그랬기에 실패로 끝났던 나의 고백의 역사는 아름답게 기억된다.
못생긴 치아가 흉측한 것만 같아서 시원스레 웃지도 못하지만, 만일 고백에 성공해 데이트를 하게 된다 하더라도 버스비조차 낼 수 없을지도 모를 정도로 형편은 비루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사랑 고백을 할 줄 알았던 당찬 중학생 나를 떠올리면 그런 것들이 지치고 힘들었던 나의 삶을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낭만을 잃지 않았고, 사랑할 수 있었던 나는 누구보다 강했던 것이라고, 그렇게 위안삼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