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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Feb 09. 2018

회사 그만두던 날 플러스 추억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의향을 상사들에게 전했다. 처음에 만류했던 상사도 내 뜻을 받아들이고 국장에게 이야기를 전하겠다고 했다. 그사이 많은 퇴사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과정은 하루 이틀 만에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나운서로 입사하는 건 참 힘들었는데, 퇴사는 일사천리다.


  사무실 내 책상의 짐들을 정리하는데, 15년의 세월만큼 쌓인 짐도 많다. 예전에 방송했던 원고에, 자료에, 책들, 명함들, 온갖 잡동사니들. 신입사원 시절에 찍었던 스티커 사진들도 있다. 예쁜 척하면서 찍었군. 즐거워 보이기는 하네. 도장도 있다. 옛날에는 도장이 꼭 필요했었지. 옛날 사람이야. 거기다 즐겨 듣던 CD들도 한 무더기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지만, 버릴 수는 없다. 이걸 어떻게 다 처리할까? 물건도 정리가 잘 안되는데, 내 마음은 정리될 수 있을까 모르겠군. 가벼운 한숨. 그리고 눈가에 고인 눈물. 평소에 눈물이 많은 나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눈물 흘리지 않으리라. 마지막 모습은 쿨하게 기억되고 싶다.

 

 나의 청춘을 함께한, 아니 내 청춘이었던 회사였다. 나의 희로애락이 여기에 다 있었다. 나는 왜 지금 눈물을 참으며 내 책상을 정리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 들어오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지금은 뭐 하고 있는 거지? MBC에 들어오기 위해서 거쳐야 했던 과정들이 아직도 또렷하다. 원서 접수부터 몇 번의 심층면접과 필기시험, 단체토론, 그리고 마지막 최종 인터뷰까지 그 어떤 것도 만만한 단계는 없었다. 하나를 간신히 통과하면, 더 힘든 다음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합격자 발표일 전날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7로 시작하는 익숙지 않은 전화번호가 떴다. 내일이 발표일인데 무슨 전화지? 번호가 7이면 여의도인데...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아보니 합격했다는 전화였다. 아나운서 시험 재수를 했기 때문에 더 오래 기다렸던 전화였다. 너무 감격스러워서 전화했던 인사부 담당자에게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1999년 12월 어느 날, 나는 그렇게 앞자리가 2자로 바뀌기 직전에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전화를 받았다. 밀레니엄 버그니 뭐니, 무슨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세상이 들썩거렸지만, 나는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다행히 2000년의 새날은 무사히 밝았고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입사 시험 때 수험표. 그때 꼽았던 핀까지.

 두 달간의 인사부 담당 교육을 마치고 아나운서국에서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었다. 1997년 이후로 아나운서 선발이 없어 오래간만에 들어온 막내들이었기 때문에 선배님들은 몹시나 환대해 주셨다. 뜨거운 환대와 함께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혀오는 교육 스케줄도 기다리고 있었다. 각 분야별로 잘 짜인 선배님들의 열정 넘치는 아나운서 교육과 점심, 저녁으로 이어지는 선배님들의 환영 식사. 매일매일을 열정으로 불태웠더니 너무 피곤했다. 동기들은 수업 시간에 하나둘씩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고, 세 명이 다 졸고 있을 때는 나라도 깨어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애꿎은 다리만 꼬집었다. 동기들아! 그렇게 먼저 잠들기냐? 나 정말 힘들었다고!


 그 당시는 지금처럼 옷을 캐주얼하게 입고 출근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평소 후줄근한 스타일을 좋아했던 나는 매일매일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게 스트레스였다. 뉴스 할 때 주로 입는 아나운서 스타일 정장은 아침부처 늦은 저녁까지 나를 압박했다. 움직임 없이 수업받고 때 되면 먹고 수업받고 또 먹고... 치마 후크가 제대로 붙어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때 찐 살이 아나운서 생활 내내 함께했다면 믿겠는가?

 

 라디오 뉴스를 처음 진행하던 날도 잊을 수 없다. 아나운서로서 가장 기본이기 때문에 잘 못하면 선배님들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던 라디오 뉴스 교육. 그만큼 많이 연습하고, 교정도 받고, 선배님들이 하는 뉴스 모니터도 하면서 준비를 많이 하긴 했지만, 막상 첫 라디오 뉴스를 하게 되니 떨린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그렇게 마음을 다독거려 보지만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머리 속은 복잡하다. 정각을 알리는 시각 고지가 끝나자마자 온에어 불이 들어온다. “MBC 1시 뉴스입니다. 정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읽어 내려간다. 시작은 좋은데? 근데 틀리면 안 돼, 어미 처리는 자연스럽게 해야지, 시간 못 맞추면 절대 안 돼! 읽기도 바쁜데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느새 날씨 원고까지 넘어가니 안도의 한숨.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할 네임 싸인 순간이다. “MBC 한시 뉴스, 지금까지 아나운서 박소현이었습니다.” 왠지 모를 짜릿함이 밀려온다. 그렇게 나는 진짜 아나운서가 되었다.

라디오 클래식 공감 원고. 아직도 거의 다 갖고 있다.

 글을 쓰면서 아나운서 교육 과정 동안 담임 선생님을 맡았던 정선배님이 떠올라 선배님께 문자를 보냈다. 그때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셨던 선배님, 힘드실 텐데 우리를 열정적으로 챙겨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때 뱃속에 있었던 아이가 이제 대학에 진학할 나이가 됐네. 아... 너무 뒤늦은 감사 문자군.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나의 문자에 돌아오는 선배님의 답장. 기억해줘서 고마워. 그때 서운했던 거 있었으면 잊어줘. 따뜻하다. 선배님은 늘 따뜻하다. 서운한 게 있었던가? 없었을 거예요. 있었다 해도 그걸 기억할 만큼 기억력도 좋지 않아요.

추억의 라디오 배당판. 반가운 이름들.

 지금은 아나운서 연수 시절도, 함께 졸았던 동기들도, 열정의 선배들도, 라디오 뉴스도 다 추억이 돼버렸다. 이제 내 이름 앞에 더 이상 MBC 아나운서라는 타이틀은 붙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그 타이틀이 그립다. 무엇보다도 그때 그 시절이, 그 사람들이 너무 그립다. 그렇지만 나는 더 이상 MBC 아나운서가 아니다. '전(前)'이라는 한 글자가 더 필요하다. 전 MBC 아나운서라고 나를 소개할 때마다 씁쓸한 건 기분 탓인가?


 힘들어서 뛰쳐나왔지만 나와보니 현실은 냉혹하다. 누구도 나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말이 실감 나는 하루하루다. 야무진 성격이 아니어서 그런지 뭘 해도 아직 어설프다. 미래를 위한 계획도, 그 계획을 위한 준비도, 그리고 마음가짐도.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냉혹한 현실에, 이불 밖의 추위에 익숙해지고 있다. 이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부터가 말이다. 그리고 이런 주제로 글을 쓰기 잘했다. 쓰고 나니, 마음이 좀 정리된다. 그만두고 2년이 지나도 정리되지 않던 내 마음이... 물론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결 낫네.


 나를 소개할 수 있는 다른 말을 찾고 싶다. '전 MBC 아나운서'라는 말없이도 설명되는 그런 사람이면 더욱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하나 생기긴 했네. 브런치 작가 박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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