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식목일에 나무를 심던 기억이 떠오른다. 땅을 파고, 뿌리를 묻고, 물을 주고 나면, 그저 기다리기만 해도 나무는 스스로 자란다. 햇빛과 바람, 대지의 품 안에서 나무는 인간의 손길이 멈춘 뒤에도 묵묵히 자라난다. 인간이 할 일은 잠시 손을 거두고 그 자람을 음미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집에서 기르는 작은 화분의 꽃이나 식물은 다르다. 시든 잎을 떼어주고, 흙을 갈아주고, 벌레를 잡아주며, 햇볕에 옮겨놓는 세심한 손길이 필요하다. 식물의 생명은 어쩌면 그 손길을 통해서만 이어지는 듯하다. 때로는 식물을 키운다는 행위 자체보다, 그 식물에 마음을 쓰는 일이 더 본질적임을 깨닫는다.
문득, 길을 걷다 마주친 개가 사람을 물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때 우리는 그 개만을 탓하지 않는다. 누가 그 개를 길렀는지, 누가 훈련시켰는지, 그 책임을 묻는다. 개 한 마리를 잘못 길러도 문제가 되는데, 하물며 한 사람을 잘못 길렀을 때의 결과는 얼마나 무서울까. 한 사람의 잘못된 성장으로 수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때로는 역사의 비극이 되기도 한다. 히틀러, 스탈린, 김정은, 그리고 광주의 아픔과 고문당한 이들까지, 그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한때는 모두 어머니의 품에서 방실방실 웃던 아이였을 것이다. 누가 그 한 살배기 아이의 얼굴에서 미래의 참혹함을 예감할 수 있었을까. 사람을 기른다는 일의 무게가 여기 있다.
반대로, 링컨, 에디슨, 아인슈타인 같은 인물도 떠오른다. 그들의 한 살 때 모습에도, 위대한 업적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을 기른다는 일은, 그만큼 두렵고도 막중한 책임이다. 부모가 아이를 낳는 순간, 이미 그 책임은 시작된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 되고, 부모의 말과 행동을 따라 배우며 자란다. 한 생명이 태어났을 때, 부모는 그 아이를 히틀러로도, 링컨으로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된다. 교육은 학습과 모방의 반복이다. 아이는 부모를 닮는다. 그래서 공자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고, 우리는 그 결의에 감탄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환경을 찾아도, 부모의 삶이 바르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가장 가까운 어머니, 아버지의 삶이 아이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잘 기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자녀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사회와 인류에 업적을 남기고, 자신이 하는 일에 자족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을 갖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가 오래도록 세상에 머물러, 그 존재만으로도 주위에 빛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떻게 해야 이런 아이를 기를 수 있을까. 좋은 스승이 필요하다. 하지만 진정한 스승은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주체적인 존재로 존중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이를 몰아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삶을 주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람을 기른다는 일은 하늘에 맡기는 일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바른 삶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예수께서는 삶으로 가르치셨다. 스스로를 가르치고, 제자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기다리셨으며, 말이 아닌 삶으로 본을 보이셨다. 그리고 그 가르침이 제자들의 삶에 새겨지도록 하셨다. 진정한 교육은 머리가 아니라 몸과 삶에 새겨지는 것임을 깨닫는다.
유대인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 마을에 학교가 없으면 마을을 폐쇄하고, 딸과 사위까지도 반드시 가르친다. 세 살만 되면 탈무드를 배우고, 성경을 읽으며, 지혜를 삶에 새긴다. 잠언은 어리석은 자를 악한 자라 부르고, 슬기로운 자를 착한 자라 부른다. 신앙인은 여호와께 여쭙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꾸지람을 달게 받는다. 그 삶의 태도가 지혜의 근본임을 잠언은 말한다.
오늘도 나는 나무를 바라본다. 땅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내 삶도, 내 아이도, 내 제자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뒤에는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내가 먼저 바른 삶을 살아가야 함을 다시금 마음에 새긴다. 이 묵상이 내 삶에, 그리고 내 곁의 이들에게 작은 빛이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