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오면 옛날엔 숲속 매미소리가 계절을 알렸는데, 요즘은 집집마다 에어컨 실외기 소리가 여름의 전령을 맡고 있습니다. 예전엔 “맴맴맴” 매미가 여름을 알렸다면, 이제는 “웅웅웅” 기계음이 여름을 알립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작은 생물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맴매이드 머신’이 여름을 알려주는 시대라니, 참으로 기이하고도 슬픈 일입니다. 문명은 점점 더 시끄러워지는데, 정작 자연의 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으니, 마이크로 목소리를 키우고, 선글라스로 햇빛을 막으며, 자동차 소리에 귀를 막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자연을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더 큰 그림에서는 자연이 우리를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컨디션 조절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 자연을 조정하는 것 같지만, 자연이 우리를 조정하고 있다는 것,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자, 이제 자연의 성격을 세 가지로 캐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자연은 쉴 새 없이 돌아가지만 결코 조급하지 않습니다. 나무에 타이머를 달아둔 것도 아닌데, 봄이면 어김없이 죽은 듯한 가지에서 잎이 돋아납니다. 억만 년을 반복해도 한 번도 조급해하지 않죠. 자연은 “오늘도 출근해야지!” 하며 허둥대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알람시계 없으면 회사도 못 가는데, 나무는 시계도 없이 정확히 계절을 맞춥니다. 이쯤 되면 자연에게 “비법 좀 알려달라”고 조르고 싶어집니다.
둘째, 자연은 다양하지만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룹니다. 하늘은 파래서 좋고, 땅은 붉어서 좋고, 잎파리는 녹색이라 좋고, 물은 하얗게 흘러서 좋습니다. 각양각색의 식물과 동물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은, 마치 하나님이 세상을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게 설계하셨음을 보여줍니다. 만약 자연이 인간처럼 “나는 빨강이 싫어!” “나는 파랑이 최고야!” 하며 싸웠다면, 지구는 벌써 만신창이가 되었을 겁니다. 자연은 다르기 때문에 아름답고, 다름이 모여 조화가 됩니다.
셋째, 자연은 스스로 돌아가지만 자아의식이 없습니다. 한문으로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뜻이죠. 영어로는 "BY ITSELF, SO"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굴러갑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I AM WHO I AM"이라고 하신 것처럼, 자연도 하나님의 자존적 존재방식을 닮았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자꾸만 자연과 자신을 분리하려 듭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자연의 한 조각일 뿐이죠.
이쯤에서 김삿갓 시인의 이야기를 빌려봅니다. “나는 청산을 가지만, 녹수야 너는 어디로 가느냐?” 산에 가서 푸른 물과 대화하는 그 여유, 그 낭만! 요즘 청년들에겐 ‘자연과 대화’라 하면 스마트폰 음성인식 기능을 떠올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연과의 대화는 우리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건강하게 만들어줍니다.
또 한편,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약초를 캘 때 무릎을 꿇고, 죽은 나뭇가지로 주변을 깨끗이 쓸고, 약초에게 “내가 언젠가는 흙이 되면, 너희가 나를 먹을 테니, 지금 너희 팔 하나를 꺾는 것을 용서해다오”라고 빌었습니다. 이 얼마나 겸손하고 유머러스한 생명 존중입니까! 백인들이 들소를 무차별로 사냥할 때, 인디언들은 필요한 만큼만 잡고, 들소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공동체가 함께 기뻐했습니다. 들소가 수증기처럼 사라지는 꿈을 꾼 추장의 이야기는, 자연을 잃는 슬픔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도 등산을 가서 땀에 젖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고, 바람 한 점에 감사하며, 논두렁과 초가집을 내려다보던 그 소박한 기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실 소풍의 본론은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이 아니라, 그 네 시간의 여정 속에 있습니다. 자연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이지만 조급해하지 않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예술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결국, 문명 속에 살면서도 자연을 닮은 한 부분이 남아있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이고,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 자연에 담아두신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는 것이야말로 진짜 행복 아닐까요? 오늘도 자연의 유쾌한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가끔은 매미 대신 에어컨 소리에도 “그래, 너도 문명의 일부니까” 하고 웃어넘길 여유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