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맛 잃은 소금과 꺼진 호롱불: 예수님이 남긴 유쾌한

by 아침햇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내 인생이 삼겹살 파티의 필수 조미료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올라가서 “너희는 소금!” 이라고 외치셨을 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누군가는 ‘아, 오늘 저녁 반찬은 간이 세겠구나’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소금이 그 소금이 아니라는 건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 순간만큼은 다들 머릿속에 김치, 된장국, 오이소박이 같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기독교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한 사람의 대단한 죽음으로 모두의 죄가 씻긴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영화 한 편 찍어도 될 법하다. 주인공 예수님, 조연 사도바울, 그리고 특별출연 십자가. 다른 종교와 비교해 보면, 불교는 부처님이 ‘마음의 평화’를 외치고, 유교는 ‘효도’를 강조한다. 그런데 기독교는? “한 분이 나무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래서 모두가 구원받는다.” 이 얼마나 파격적이고, 또 얼마나 심오한 설정인가!


사실 예수님이라는 분, 우주의 끝에서부터 지구까지 오셨다더니, 막상 등장하신 모습은 5척, 6척밖에 안 되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분이 우주를 창조했다니, 이건 마치 ‘내가 사실 어벤저스의 리더였다’고 주장하는 옆집 아저씨만큼이나 황당하다. 하지만 신앙이란 게 원래 논리로 설명이 안 되는 거라, 이 돌멩이 같은 주장 앞에 우리는 늘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다. 씹어 삼키자니 소화가 안 되고, 뽑아버리자니 기독교가 성립이 안 된다. 결국 이 수수께끼를 품고 사는 게 신앙인의 운명 아니겠는가.


그런데 또 한 가지 궁금한 점.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악을 행하라’고 가르치는 교과서는 없다. 그런데 악은 어찌나 성공적으로 교육되는지, 이건 정말 미스터리다. 착하게 살라고 도덕 교과서에서 수도 없이 배우지만, 훔친 떡이 더 달다는 진리는 왜 이리도 쉽게 퍼지는 걸까? 인간의 본성이란 게 참 오묘하다. 교실에서는 ‘착하게 살자’ 외치고, 복도에서는 ‘내 떡은 네 떡, 네 떡도 내 떡’이 되는 현실. 이쯤 되면 악의 교육은 교과서가 아니라 본능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TV를 틀면, 한 프로그램에 한 명쯤은 꼭 죽는다. 서점에 가면, 소설의 절반은 살인 사건이 중심이다. 이쯤 되면 인간은 본디 악한 씨앗을 품고 태어난 게 아닐까 의심이 든다. 고대 철학자들도 이 문제로 머리를 싸맸다.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 하지만 현실은 단순하다. 내 안에 훔친 떡이 더 달다는 본능이 엄존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성경에서도 이런 인간의 본성을 인정한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니, 착한 사람 하나 없더라는 절망적인 선언. 사도바울도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이쯤 되면 인간이란 곧 ‘악인’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죽으신 사건이 기독교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에야 부랴부랴 ‘효도’를 시작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살아계실 때는 별로 신경 안 쓰다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아, 그분이 이런 말씀도 하셨지’ 하며 신주 모시듯 한다.


진정한 효도는 부모님 살아계실 때 뜻에 순종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하신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 진짜 신앙 아니겠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산 위에 올라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라고 하신 말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별 볼 일 없는 ‘잡종’들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너희만으로도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하셨다. 이 얼마나 통 큰 믿음인가!


소금이란 게 원래 음식에 한 움큼씩 넣는 게 아니라, 몇 알만 뿌려도 음식 전체의 맛을 바꾼다. 예수님 눈에는 세상이라는 음식에 몇 알의 소금, 즉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들어가야 썩지 않고, 맛이 난다고 보신 것이다. 만약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사람들이 밟고 다닌다. 이건 마치 밥에 모래알이 씹히는 것처럼, 교회가 사회에서 소금 대신 모래알 역할을 하는 현실을 꼬집는 말이다.


빛도 마찬가지다. 등불을 켜놓고 바가지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빛은 집안에서 제일 높은 곳에 두어야 모두가 볼 수 있다. 그런데 급한 일 생겨서 호롱불 찾았는데 기름이 없거나, 플래시 라이트 찾았는데 배터리가 다 닳아 있다면? 그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교회가 등대 역할을 못하는 현실,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귀 기울여야 할 이유다.


구약에서 소금은 부패 방지와 부정 방지의 상징이다. 제물에도, 심지어 향불에도 소금을 넣었다. 신전 주변을 소금으로 깔아 부정을 막았다. 창세기에서는 소금 열 알만 있었어도 한 도시가 망하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예수님은 이런 소금의 역할을 우리에게 기대하신 것이다. 그리고 빛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제일 먼저 창조하신 것. 예수님도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다. 불을 지르러 오셨다는 말씀은, 이 세상을 확 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인간의 본성이 썩었다는 절절한 외침이기도 하다.


결국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단순하다.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라.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착한 행실을 강조하면 괜히 무겁게 느끼고,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더 깊은 덕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고민한다. 나는 과연 짠맛 나는 소금인가, 아니면 씹히기만 하는 모래알인가? 내 빛은 꺼진 호롱불인가, 아니면 어두운 방안을 환히 비추는 작은 촛불인가? 예수님은 죽은 뒤에만 모셔두는 신주가 아니라, 살아계실 때 남긴 말씀을 실천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오늘도 삼겹살에 소금을 뿌리며, 나는 다짐한다. “짠맛을 잃지 말자. 그리고 내 작은 빛이라도 꺼뜨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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