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출근을 하니 금방 여름이 왔다.
열명 남짓한 인원의 우리는 각자의 지난 주에 진행한 업무, 그리고 해당 주에 진행할 업무를 월요일 주간회의에서 공유했다. 대표인 구찌는 시리즈 B 투자가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투자와는 별개로 우리는 기술과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한 진단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모아야 했다. 우선은 만 건에서 2만 건 정도의 환자 유전체 데이터를 모으면 기술적으로 서비스의 정확도를 높이기에 충분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상상도 가지 않는 숫자였다. 이를 사전에 공유했을 구찌와 노블 등 주요 C-level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당황했을 것이지만, 그 누구도 내색하지 않았다.
단시간에 빠르게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 노블이 제시한 방법은 공동연구, 쉽게 말해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진단데이터를 얻는 방법이었다. 흔히 베타테스트라고 부르는 영역을 공식화한 명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공동연구 대상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 기술개발팀이 활용하던 크롤링이라는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다. 인터넷 상의 희귀질환과 관련된 여러 논문을 수집하는데 사용한 방법인데, 논문의 저자가 되는 의사나 연구자의 정보 역시 수집되고 있었기에 이를 활용하게 되었다.
그렇게 첫 타겟이 된 66명의 의사에게 공동연구 제안 메일을 발송했다. 66명 중 가입까지 이어진 고객은 단 한 명, 공짜로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는데, 고작 명만 반응한 게 이해할 수 없었다. 수백만원에서 수 천 만원까지 육박하는 서비스의 가치를 정말 모르는걸까?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제목, 버튼 문구, 이메일 내용을 개선하며 숫자를 높이기 위해 애썼지만 단시간에 빠르게 개선 되지는 않았다. 그로스해킹은 많은 시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소피아와 나는 너무 낙심하지 않기로 했다.
“오전 9:50 gucci : 어제 이슈로 support 계정이 일시 정지 되었네요”
갑자기 회사의 주요 업무 이메일 계정이 사용 중지되어 버렸다. 마케팅팀 뿐만아니라 전체 직원의 모든 이메일이 사용 중단 되어버려 모두가 당황했다.
알고보니 이메일 마케팅 서비스로 사용하고 있던 스티비를 사용해 대량 발송한 이메일이 구글에 스팸으로 인식되어 발생한 해프닝이었다. 해결을 위해 인터넷을 백방으로 뒤져 방법을 찾아내고, 구글에 서포트 메일을 보내고, 스티비 담당자와 여러차례 연락한 뒤 하루 뒤 쯤 문제를 겨우 해결할 수 있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기존 이메일 마케팅 서비스들이 여러 대의 서버에 걸쳐 발송하는 것과 달리 스티비의 자동메일이 하나의 서버에서 전송되기 때문에 해당 서버 주소가 구글의 spam filter에 걸린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우리의 대량 콜드 메일링은 한 번 줄어들었다. 이후에는 메일링 수를 줄이고, 한 번에 보내는 대상의 범위도 더 좁히기로 했다.
대량으로 보내는 이메일 마케팅의 시장은 사람들과 정부의 개인정보 보호 규제와 함께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 서비스는 진단에 준하는 리포트를 의사 고객에게 전달하기에, 의사만 주문할 수 있는 서비스였다. 따라서 새롭게 가입하는 사람들이 어느 국가 사람이든 면허가 있는 의사라는 점을 확실히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우리가 고안한 방법은 미리 국가 별 의사 면허 형식을 정리해 둔 다음, 가입 시 수집하는 폼에서 의사 면허 정보를 받아 분류하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시도는 금방 벽에 부딛치게 되었. 3명의 직원이 나누어 각 국가 마다의 의사 면허 번호의 형태를 찾아 표로 정리하는 작업을 해봤지만, 곧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유는 ‘너무 많은 변수'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정보'에 있었다. 아직 고객이 충분히 많지도 않음에도 성급하게 효율화 하려는 시도였기도 했고, 국가 마다 분명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형식이 알려진 국가와 알려지지 않은 국가가 모두 있었다.
빠른 실험과 시도, 성과 분석과 개선이 필요한 상황에서 성급한 효율화를 위한 정보탐색이 아직은 맞지 않은 때였던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오프라인 전시회에서 전시자로써 참석했다. 당시에 우리는 국가에서 진행하는 과제의 팀에 속해있었기에, 과제 공통 부스의 일원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코엑스에서 열리는 전시회였는데 소피아와 둘이 참여해 간략하게 서비스를 소개하기도 하고 시연을 하기도 했다.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서비스 소개가 쉽지 않았는데, 계속 하다보니 점점 입에 붙어가는게 느껴졌다. 기술적으로 외웠던 내용도 방문자들과 함께 질의문답을 반복하니 점점 이해하며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직접적으로 고객으로 전환될 만한 의료진이 많이 방문하지는 않았다. 워낙 서비스 분야가 좁고 깊어서 타겟 범위도 그다지 넓기 않기 때문일까? 어쨌든 나에게도 사무실에만 있는 것 보다 좋은 날씨도 만끽하고, 회사의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써 고객을 직접 대면해 서비스를 설명하는 기회가 의미 있었다. 이삼일 간 하루종일 서 있었더니 전시회가 끝나고 나서는 방전이 되어 몸저 누워버렸다.
첫 국내 오프라인 부스 참석 이후, 오프라인 행사에 몇 차례 더 참여했다. 2019년 말 부터는 중동에서 열리는 의료 전시회 Medlab ME의 참석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었고, 국가 지원 부스의 남는 자리에 합류해 조금 더 저렴하게 참석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간 다닌 국내 학회에서는 영업의 자리라기 보다는 기존 고객들과의 관계를 다지는 자리의 목적이 더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국제 전시회는 더 세일즈에 가깝기에 다이나믹한 모습이 기대되었다. 게다가 살면서 중동 국가는 처음 방문하게 되는 것이라 더 기대가 컸다.
도착해보니 수 만명이 방문하는 대형 전시회였다. 코로나가 막 시작되던 찰나였지만 많은 참석자와 전시업체가 있었다. 해외 전시 참여도 떨리는데 대표와 둘이서 가야해서 더욱 긴장이 됐다. 참여 목적은 고객과 유통업체와의 관계 만들기였다.
수 만명이 방문하는 두바이의 전시회였지만 점심시간이나 마감시간이 가까워 오면 그 많던 인파들이 자리를 싹 비웠다. 열심히 입이 마르도록 방문자들에게 회사와 서비스를 소개하다가 이 시간 즈음에 나도 다른 업체 부스를 구경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어떤 회사 부스의 직원은 누가 오던 안오던 신경 쓰지 않고 노트북을 하거나 핸드폰에 열중하고 있었다. 수 천만원에서 수억 원을 들여 이 자리를 구매했을텐데, 말그대로 자리만 지키고 있는 모습이 의아했다. 그 모습을 본 대표님과 나는 “우리는 언더독 전략을 취해야 할 진짜 언더독이니, 더욱 적극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을 모으자”고 다짐했다.
돌아오는 길, 우리는 목표했었던 200명에 가까운 관심 고객 목록을 쥐고 있었다.
아쉽게도 전시회 직후 코로나 바이러스가 더 크게 창궐해 Medlab에서 얻은 유통사와 현지 실험실의 연락처는 쉽게 사업 기회로 넘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 첫번째 해외 전시회의 경험으로 우리는 해외에서 열리는 다음 학회와 전시회를 더 전략적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2년, 미국과 유럽은 벌써 코로나와 함께 생활할 준비를 마치고 마스크를 벗어던지기 시작했다며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발맞추어 국제 학회와 전시회는 다시 시동을 걸고 있었기에, 우리 역시 미루고 있던 해외 학회와 전시회 참가에 다시 발동을 걸었다.
미국에는 ACMG라는 유전학자와 의사 등 의료진을 위한 인간 유전학 학회가 있다. 사실 상 해당 기술이 가장 발전하고 상용화 된 나라가 미국이기 때문에, 우리는 해당 학회의 부스 참가를 이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우리 서비스는 ‘희귀질환 환자를 위한 유전자검사'라는 이름을 봤을 때는 매우 특별한 서비스였다. 하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후발주자였다. 따라서 이미 이 기술과 서비스에 익숙한 학회 사람들에게 단순히 기술이나 가격을 강조하는 방식으로는 눈에 전혀 띄지 않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우리에겐 좀 더 눈에 띄는 전략이 필요했다.
마침, 2021년은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이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쳤던 해로,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문화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이 드라마를 모를 수 없었다.
달고나와 마스크를 제작해 ‘오징어 게임'의 비주얼을 차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모았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우리만의 독특한 선물 giveaway을 만들고, 부스를 우리의 컬러와 오징어게임의 비주얼을 함께 버무렸다.
결과는 성공적. 특별한 SNS마케팅을 시도하지 않아도, 단순히 비주얼 만으로, 나누어주고 있는 저렴한 선물 만으로, 학회 내 입소문 만으로 우리의 존재를 인식 시킬 수 있었다.
<쓰리빌리언의 기업문화 02 - DM은 자제해주세요>
오늘 대표인 구찌가 슬렉에 갑작스레 DM을 자제하라는 내용을 올렸다. 업무에 관련된 내용은 3인 이상의 채널을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업무 생산성 및 소통을 위한 도구 슬랙은 자체적으로 ‘대시보드' 기능을 제공하는데, 여기서 전체 사용자의 메시지 비율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그 비율을 확인한 구찌가, 더 솔직하고 공개적인 소통이 전체 업무의 공유, 효율 개선에 주는 효과를 알고 강조하기 위해 의견을 낸 것이다. 게다가 DM은 휘발성이 있어 90일이 경과하면 사라지므로 꽤 합당한 조치였다.
이 때 이후로 마케팅팀과 나는 일부러 더 마케팅 채널에서의 소통을 높여나갔다. 그리고 때때로 상세한 논의를 위해 DM으로 소통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업무에 대한 소통 역시 이곳에서 발생하게 될 때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마케팅 업무를 위한 채널로 돌아갔다.
업무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두가 확인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서로의 업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추후 관련 task에 대한 불필요한 논의가 적어진다는 것은 분명한 이점이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이러한 문화는 현재 꽤나 잘 정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