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썼는데, 그것도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30초 만에 휘리릭 썼는데. 왜 이리 울컥한 걸까요. 친정엄마. 그 4글자 안에 담긴 한없는 푸근함 때문이겠죠. 오늘 워킹맘 에세이는 번역하는 엄마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눈물 뚝뚝 흘리며 쓰게 될까 벌써부터 걱정이네요.
후우, 숨 한 번 크게 쉬고 시작해 볼게요.
책 마감 3주를 앞둔 요즘, 저는 깨어 있는 시간의 절반을 번역하고, 나머지 절반 중 절반은 아이들을 챙기고 또 다른 절반은 글을 쓰며 지내고 있습니다. 사실 글쓰기는 밤에 하릴없이 핸드폰을 보거나 TV 앞에 앉아 있던 시간을 활용하는 거라 일상에 큰 지장은 없습니다. 다만,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에 일을 해야 하다 보니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지죠. 그럴 때 생각나는 단 한 사람, 바로 친정엄마입니다.
"엄마, 나 당분간 마감해야 해. 이번 주, 다음 주 일주일에 세 번. 와줄 수 있지?"
"(40년 서울살이로 퍽 중화된 부산 사투리) 알았다, 가시나. 맻시까지 가모 되노?"
늘 툭툭 거리지만, 내 마음에 안 들면 아직도 불같이 신경질을 내지만 엄마는 39년째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 나무처럼 한결같이 나의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나의 쉴 곳이 되어 주십니다. 철부지 딸내미가 낳은 두 아이들에게는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따뜻한 할머니가 되어 주십니다. 엄마의 그 큰 사랑을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요.
돌이켜보면 우리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이미 15년 시집살이를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할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면서도, 온종일 외출 한 번 없이 삼시 세끼 꼬박 집에서 드셨던 할아버지의 식사를 책임지면서도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셨습니다. 오빠와 나에게 짜증 한 번 없이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그 힘든 세월을 견뎌내셨습니다.
그런 엄마였기에, 결혼 당시 합가 소식을 전하며 저는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엄마가 반대를 하실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엄마는 흔쾌히 제 편이 돼주셨습니다.
"OO아, 시부모님이랑 같이 살면 좋은 점이 더 많다 니. 아나? 특히 느그 아아-들, 아아-들한테는 할머니 할아버지만큼 좋은 게 없다. 처음에는 쪼매 힘들어도 익숙해지면 니도 편코 좋다. 엄마도 힘들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잘했다 싶다."
그땐 사실 엄마 말이 잘 들리지가 않았습니다. 결혼을 한다는 사실에 마냥 들떠 있어 합가를 하든 분가를 하든 결혼만 하면 되지 뭐, 이런 생각이었거든요. 스물아홉이면 어린 나이도 아니었는데 그땐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네요. 그러고 보면 엄마는 늘 제 선택을 응원해 주셨습니다. 대학을 갈 때도, 외국 연수를 갈 때도, 언론사 시험을 준비할 때도, 다 포기하고 회사에 들어갈 때도, 그리고 결혼을 할 때도. 엄마는 우리 딸을 믿는다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항상 저를 지지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제가 결혼을 하고 벌써 10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아직도 우리 집에 발걸음 하시기를 꺼려하십니다. 시어른들이 계시는 집에 친정엄마가 자주 들락거리면 보기 안 좋다는 이유에서죠. 지금은 여건상 시부모님이 지방에 계시고 주말에만 오시지만 엄마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위도 여전히 어려워하십니다. 요새는 장서갈등이 주된 이혼 사유라는데 늘 사위 편에서 딸을 나무라는 엄마에겐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8년 전, 제가 큰 애를 낳고 산후조리를 할 때였습니다. 조리원에서 친정으로 가려했지만 당시 친정에서 키우던 개 때문에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그냥 집으로 왔습니다. 자연히 함께 살던 시어머니께서 이런저런 수발을 해주셨는데, 엄마는 시어머니께 죄송하다 시며 어머니가 외출하실 때마다 집에 오셔서는 온갖 집안일에 아기 빨래, 제 식사까지 준비해 주고 가셨습니다. 온종일 일만 하다 어머니 오시기 전에 가는 게 좋겠다며 서둘러 짐을 챙겨 나서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질 않습니다. 그때 엄마가 해주던 음식은 왜 그리 맛있던지요.
제가 돌쟁이 큰애를 두고 대학원에 다닐 때도 엄마는 누구보다 큰 힘이 돼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만으로 살기보다 제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일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엄마, 나 1년 더 휴학할까 봐. 아직 젖도 안 뗀 애 놓고 학교 가기가 좀 그래. 어떡하지?"
"OO아, 공부는 다 때가 있다, 아나? 1년 더 늦춘다고 해서 안 달라진다. 그때 가모 또 그때 나름대로 못 갈 이유가 생긴다. 그냥 마음먹었을 때 등록 해삐라!"
그러면서 엄마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스무 살 때까지 한 달에 5만 원씩 넣은 교육보험을 깨서 등록금을 하라고 주셨습니다. 돌쟁이 아이를 두고 대학원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이자 지원군은 바로 엄마였습니다. 그 뒤로 엄마, 아빠는 일주일에 두 번씩 차로 한 시간 거리의 저희 집에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오셔서 큰애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학교에 있을 때는 수업에만 집중하라며 전화도, 문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친정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 일은 학교만 졸업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일을 하면서 더 의지하게 된 것 같네요. 요즘처럼 책 마감에 돌입하거나 일정이 빠듯한 급한 의뢰를 받는 날이면 언제나 엄마에게 SOS를 칩니다. 그럼 엄마는 못 이기는 척 집으로 와주십니다. 아이들은 할머니! 하고 달려가 안기며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흔쾌히 저를 보내주고요. 그러고는 늘 그렇듯 집에 들어서자마자 일거리부터 찾아서 뭐라도 하십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저도 마음속 소원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나도 우리 ㅇㅇ이한테 우리 엄마 같은 친정엄마가 돼주어야겠다는 소원입니다. 그래서 얼마 전 제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OO아, 엄마도 나중에 외할머니처럼 우리 OO이가 낳은 아이들 다 키워줄게. 그때 되면 엄마 번역 일 조금만 하고 아빠랑 같이 손자들 봐줄 거야. 그러니 OO이도 열심히 공부해서 멋진 직업 갖고 당당하게 살아가렴!"
그래서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하나 봅니다. 우리 엄마에게 받은 사랑을 딸에게 줄 생각만 하고 있으니 말이죠. 비록 여기서나마 엄마에게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고백을 해봅니다. 엄마, 엄마가 내 엄마여서 정말 행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