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괜찮지 못한 인간> / 박도 지음
어디서 잘못 배운 건지 모르겠으나 한 때 누군가를 좋아하면 반드시 고백 해야하는 병에 걸려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대학교 4학년 때까지 고백을 한 100번은 했던 것 같은데 이루어진 건 딱 한 번이었다. 학원 자습실 유리창에서 흰 남방에 청바지를 입은 남자애를 보았다. 천계영 만화책에 나올 법한 비주얼이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만화책으로 따지자면 안경 쓴 주근깨 많은 친구 3 역할을 할 법한 나는 그에게 고백을 하기로 결심했다. 결코 이루어지는 법이 없는 친구3과 주인공의 로맨스라. 추억의 메신저 버디버디로 그의 아이디를 알아냈다. 사귀고 싶다고 고백했고, 걔는 고맙다고 노력(?)하겠다고 만나자고 했다. 그 애가 정말 날 여자친구로 받아준 건지 그저 만나서 놀자던 거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고백한 자의 입장에서는 분명 수락의 의미였다. (맞지요?) 그러니 나에게 그는 첫 남자친구였다. (미저리 주의) 걔가 내 책을 읽고 그런 적 없다고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 이상 그런 것이다. 그나마 14살이었으니까 불쌍하고 소름 끼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길 바란다!
3개월 동안 문자를 주고받고 전화도 종종 했지만 짝사랑하는 기분을 떨칠 수는 없었다. 사귀는 사이에 흔히 만나서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건네주는 것도 부끄러웠다. 그가 사는 아파트 문 앞에 초콜릿을 놓고 언제 가져가는지 복도에 숨어서 지켜봤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러다 딱 한 번 진짜 데이트를 한 적이 있다. 동네 영화관에서 류승범, 공효진 주연의 <품행제로>를 같이 봤다. 그날도 영화관 입구를 지켜볼 수 있는 캔모아에 미리 가 있었다. 녀석이 오나 안 오나 지켜보았다. (약속했는데 왜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는 정각에 친구와 함께 왔고 그 친구는 나를 보고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 ‘친구한테 여자친구 생겼다고 보여주려고 한 건가?’라고 멋대로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날 영화는 보지 않고 그의 옆모습과 손을 바라보았다.
그 후로는 연락이 끊겼다. 내가 끊었을 리는 없고 차인 것 같다. 같은 게 아니라 차였다. 고백은 잘하지만 차이면 깔끔하게 마음을 정리하기 때문에 그 후로는 간간이 소식만 들었다. 그 애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친구 종보한테 “걔 어디 대학 갔대?”라고 물어보긴 했으나 사소한 호기심일 뿐이었다. 정말로.
단 한 장의 이미지로만 그를 기억한다. 그때 난 2차원 세상에 살고 있었다. 흰 남방에 청바지를 입은, 목이 길고 머리카락이 바가지머리처럼 길었던 소년. 그 모습이 담긴 만화책의 한 페이지에서 오래오래 머물렀다. 누가 심장을 움켜쥐었다가 놓기를 여러 번 반복하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 심장이 하는 일을 그때 알았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