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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Oct 08. 2024

책으로 죽는 기분



한 출판사 대표님과 카톡을 나누다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


"책을 다섯 종 내면 어떤 기분이세요?"


그냥 뭐, 똑같죠. 인생여전. 극적인 반전 없고, 아직까지 막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여섯 번째 책은 낼 수 있을까 싶고, 작가 지망생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거 같아요.


실제로 그렇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 아니 당신은 2019년부터 매년 책을 내고 있는, 잘생기고 귀엽고 놀라운 필력을 지니고 있는 이경 작가! 하면서 사인을 요청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책이 불티나게 팔려서 인세가 두둑하게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SNS에서는 아직도 나를 여성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하아. 내가 쓴 책 하나라도 읽어봤다면, 나를 여성으로 오해할 일은 없었을 텐데, 결국 내 책 하나도 안 읽어봤다는 이야기 아닌가.


글쓰기나 책 쓰기 강사들은 수강생들에게 책 쓰기에 도전해 보라고, 책을 내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좋은 일이 생긴다고 말하지만, 나는 어지간하면 때려치우라고 하고 싶다. 책이라는 것은 독자로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것이고, 쓰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죽는 기분이 드니까.


책을 쓰겠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부터 사람은 욕심쟁이가 된다. 처음에는 그저 글을 쓰고 원고를 완성할 수만 있다면 하는, 소박한 자기만족으로 시작하였다가 하나둘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게 되는 것이다. 내 글을 알아봐 주는 독자 한 명만 있었으면, 내 글을 이해해 주는 편집자 한 사람만 있었으면, 내 글을 책으로 내줄 출판사 하나만 있었으면, 하면서 서서히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이다.


그러다 결국 자신의 글을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한 작가 지망생 일부는 POD라는 이름의 자가출판 세계로 빠져, 주문하면 일주일 만에 만들어지는, 전연 팔리지 않는 책을 내고서, 헤헷... 나는 작가다... 내가 작가가 되었다... 나는 글 쓰는 사람이다... 하는 정체성을 갖게 되지만, 세상 사람 대부분은 그를 작가로 여기지 않는다. 나는 나를 작가라고 생각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왜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지 않는가 하면서, 스스로 만든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부정을 당하는 삶을 살며 죽어가는 것이다.


또 몇몇 작가 지망생들은 책을 내고 싶다는 욕심이 너무 과한 나머지, "당신은 신인 작가니까 인세는 꼴랑 5%입니다, 이 바닥이 원래 그래요,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받는다구." 하는 파렴치한 출판사를 만나고서도, 아이고 그렇습니까, 제 책을 내주시기만 한다면, 하면서 굽실굽실거리고, 혹은 "아, 우리는 양심 있는 출판사입니다. 인세는 당연히 10%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신인 작가이니까 책이 나오면 책을 좀 사주셔야겠습니다. 한 300권?" 하는 역시나 얼토당토않은 허섭쓰레기 같은 출판사를 만나, 자신이 당하고 있는 것이 사기임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아주 간혹, 일부 작가 지망생들만이 출판사의 선택을 받는다. 어쩌면 운의 영역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실력의 영역일 수도 있겠지만, 바로 나 같은 사람들. 이 글을 보는 당신이 혹시 작가 지망생이라면 이런 글을 쓰는 내가 몹시 밉고, 재수 없고, 한편으로는 부럽고도 속이 상해서는, 기어코 악플을 달아서 이경 저 자식의 기분을 조져버릴까 싶기도 하겠지만, 당신은 어찌할 수가 없다. 내가 없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앞서 말했듯 책은 끊임없이 사람을 욕심쟁이로 만든다. 어찌저찌하여 책이 세상에 나오더라도, 책은 여간해서는 팔리지 않는 물건이다. 세상에 나오는 대부분의 책은 손익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책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백에서 천만 원이 넘게 깨지는데, 결국 팔리지 않는 책을 보며 출판사의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이다. 아아, 출판사에 민폐를 끼쳤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책 따위를 써서 이렇게 주변에 민폐를 끼치었는가.


보기 좋게 첫 책이 실패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책 쓰기를 멈추고서는 '단권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서 예전처럼 행복한 독자로 살아가는 듯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일부 욕심쟁이들은 여전히 바보처럼 책 쓰기에 도전을 하고서는 재탕 삼탕 망하는 삶을 살아간다.


책, 책, 책 하나만 낼 수 있다면, 하던 꿈은 그렇게 두 번째와 세 번째 책 출간의 욕심으로 번지고, 이왕이면 책이 좀 더 팔렸으면, 이왕이면 중쇄를 찍었으면, 이왕이면 1만 부를 넘어, 5만 부를 넘어, 10만 부를 넘어, 기세가 등등해져 해외진출에도 박차를 가하고, 오디오북으로도 만들어지고, 영상화도 되고, 100만 부가 팔렸으면, 그러다가 이상문학상도 받고, 부커상도 받고, 노벨문학상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이 모두는 대개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설령 책 하나로 많은 꿈을 이루고 부와 명성을 얻는 이가 있더라도 그는 그 성공으로 말미암아 차기작에 대한 무거운 압박감을 느끼며, 더 이상은 글을 써내지 못하고 여생의 대부분을 하얀 모니터 속에서 깜빡이는 커서만을 응시한 채 괴로워하며 보낼지도 모른다. 망해도 괴롭고, 성공해도 괴롭고. 책이 이렇게나 위험하다.


애초에 책 하나만 낼 수 있었으면 하는 꿈의 결실이 이루어지더라도 책은 이처럼 새로운 꿈을 만들어내며 그때마다 글쓴이를 좌절케 만든다. 아무렴, 책은 읽을 때가 행복한 법이며, 쓰기 시작하면 괴로움의 시작이다.

출판사가 저자와 계약을 맺으면 보통은 5년을 계약하고 요즘에는 3년도 흔하다고 들었다.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가 되지 못한 책들은 이 계약기간을 지나고 나면 자연스레 절판으로 들어간다.


절판은 곧 책의 죽음. 이렇다 할 호성적을 거두지 못한 나의 책들은 하나둘 계약 종료 시점을 향해 나아가고,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자연스레, 또 어찌하지도 못하는 채 책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할 것이다. 절판이 책의 죽음이라면, 책의 죽음은 글쓴이의 죽음과 다름없다.


하루하루 책으로 죽어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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