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Y내과 의사 선생님을 알게 된 지는 10년 정도 된 듯하다. 사무실 근처에서 통풍약 처방전을 내어줄 병원을 찾다가 내원하게 된 것이 첫 인연이었다. 오래된 상가 2층에 있는 오래된 병원이었다.
처방전에 따르면 통풍약은 하루 세 번 먹도록 되어있었지만, 나름 약이 잘 들어서인지 나는 하루 한 알 정도만 먹을 뿐이었다. 그렇게 선생님을 한 번 찾아뵐 때마다 두 달치의 약을 처방받으면 나는 오육 개월 후에나 선생님을 다시 찾아뵙고 처방전을 받는 식이었다.
처방전만 발급해 주면 그만이라, 여느 병원의 의사가 그러하듯 1분 진료를 보아도 괜찮았을 텐데, 선생님은 갈 때마다 늘 이런저런 말을 붙이시곤 하셨다. 특히 종종 첫인사로 "요즘에는 뭐 재미난 일 없어요?" 하고 물어보시곤 하셔서, 글쎄요 요즘에는 그다지 재미난 일이 없는 것 같다고 말씀드리면 외려 자신이 겪은 재미난 일들을 들려주곤 하셨다.
처음에는 환자를 붙잡고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선생님을 보면서, 수다쟁이 할아버지라는 생각도 들었고, 빨리 처방전이나 받아서 나갔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점점 재밌어지기도 하고, 내가 언제 이렇게 똑똑한 어른과 대화를 나눠보겠나 싶어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점차 귀담아듣게 되었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의사 활동을 했다.)
그는 통풍 환자가 피해야 할 음식처럼 의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등산을 다니던 이야기, 과거 하와이에서 내기 골프를 하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으며, 비트코인이나 코로나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견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줄곧 처방전을 받기 위해 내원했던 Y내과를 3년 전쯤에는 통풍이 아닌 다른 몸의 이상으로 찾게 되었다. 선생님은 평소와 달리 심각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큰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며, 재빨리 상급병원으로 연결시켜 주셨다. 한동안 큰 병원에 다니며 검사를 하고 치료를 하고는 다시 Y내과를 찾았을 때, 나는 선생님 덕에 병을 빨리 발견하고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며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날 나는 선생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며 조금 울 뻔했고, 선생님의 표정은 조금 씁쓸해 보였다.
Y내과로부터 문자가 온 것은 지난 5월 6일의 일이었다. 그동안 Y의원을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원장님의 일신상의 이유로 휴업을 하게 되었다고. 갑작스러운 휴업 소식에 송구하다고.
선생님께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폐업이 아니고 휴업이라는 걸 보면, 잠시 쉬셨다가 다시 병원 운영을 하시려는 걸까. 안식년을 가지시고 멀리 여행이라도 떠나신 걸까. 근데 왜 마지막인 듯 '그동안'이라는 표현을 쓰셨을까.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지역 카페에 관련 소식이 올라오지 않았을까 싶어 찾아보았을 때, 선생님이 5월 5일에 별세하셨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연세는 있으셨지만, 어디 편찮은 곳이 있어 보이진 않으셨는데.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요즘에 뭐 재미난 일 없어요?"라는 질문에 나는 단 한 번도 재미난 일이 있다고 말씀드리질 못했는데. 언젠가 책이라도 많이 팔리는 날이 오면, 아, 선생님 제가요, 사실은 책을 쓰는 사람인데요, 이번에 제 책이 되게 잘 팔려서 그게 너무 재밌거든요, 하면서 내가 쓴 책을 한 번 읽어주십사 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영영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