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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Oct 15. 2024

강사 이력서엔 다섯 줄




2007년에 발표된 다이나믹 듀오(Dynamicduo)의 <동전 한 닢> 리믹스 트랙에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가사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가장 유명한 가사라면 피타입(P-Type)이 노래한, 븅신이 븅신인 걸 알면은 븅신이 아니다, 하는 소위 ‘븅신 랩’이 있겠다.


그런데 내가 곡에서 제일 멋지다고 생각하는 가사는 이센스(E SENS)의 벌스에 등장하는 라인인데, 자신의 이력서에는 모두 빈칸이고, 그 첫 줄에는 ‘한국힙합’이라는 네 글자가 적힐 거라는 내용이다. 


정말 너무 멋있는 가사가 아닌가. 만약 이센스가 자신이 뱉은 가사처럼 성장하지 못하고 그저 그런 래퍼가 되었다면, 이런 내용의 가사는 특별할 게 없었겠지만, 십수 년이 흐른 지금 이센스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한국힙합을 대표하는 뮤지션이 되었다.


다섯 번째 책을 내고서 한 도서관 사서 선생님의 제안으로 오프라인에서 독자님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강연이나 강의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내가 꼭 무언가를 알려드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라 좀 부끄럽고, 그냥 '저자와의 만남'이라고 생각했더니 비교적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뭐 누구한테 가르칠 게 있나, 그냥 옹기종기 모여서 책이야기나 좀 떠들어보자 싶었던 거지.


근데 또 도서관에서 요구하는 서류 등은 갖추어야 하니까, 도서관에서 보내준 강사 이력서에 이름과 연락처, 이메일 등의 기본 사항들을 적어나갔다. 그렇게 비교적 기입하기 쉬운 칸들을 채우고 났더니, 마지막엔 최종보스처럼 약력 칸이 기다랗게 있는데, '학력, 경력, 강연, 저서, 수상' 등을 넣으면 된다고 쓰여 있다.


보자보자, 학력은 가방끈이 짧아서 못 쓰겠고, 경력도 그다지 내세울 게 없으니 쓰질 못 하겠고, 강연 경험도 없고, 수상한 것도 없으니 결국 약력 칸에는 그저 다섯 줄의 저서 내용만 넣게 된다.


2019년 소설 <작가님? 작가님!> 발표

2020년 에세이 <힘 빼고 스윙스윙 랄랄라> 발표

2021년 에세이 <난생처음 내 책> 발표

2022년 에세이 <작가의 목소리> 발표

2023년 에세이 <그 노래가 내게 고백하라고 말했다> 발표


이렇게 사서 선생님에게 제출하는 내 강사 이력서에서는 이 다섯 줄이 전부가 되었다. 책이나 써서 다행이지, 책을 안 썼으면 약력 칸에 넣을 게 하나도 없을 뻔했다. 책을 쓰면 이런 게 참 좋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


그리고 이 다섯 줄이 글쟁이에겐 나름의 멋이 아니겠냐며. 

어쩐지 이센스가 된 기분이다 이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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