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맑은 날, 옛일을 떠올리며 후회하는 한 여성이 있다. 그녀가 떠올리는 그날은 오늘과 다르게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원래의 계획대로였다면 그녀는 그날 카페에서 상대방을 만나 이별의 말을 전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연애 끝에서 오고야 마는 헤어짐의 시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약속과 달리 카페에 들어가지 않고 멀찌감치서 상대방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홀로 카페에 있던 그는 차를 한 잔 마시고, 또 한 잔을 더 마시면서까지 그녀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이별의 말을 전하기보다는, 잠수이별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그녀는 비 내리던 그날을 떠올리며 안녕이라도 놓친 걸 후회하는 중이다. 잠수이별을 겪은 그가 그날을 떠올리게 된다면, 자신을 용서해 주길 바라면서.
이상은 박정현의 일곱 번째 정규 앨범 [10 Ways To Say I Love You]에 수록된 <비가>의 내용이다. 작곡과 작사, 편곡 모두 박정현이 했다. 자세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박정현이 어느 한 방송에 나와 이 곡을 소개하면서, 언제라도 바로 부를 수 있는 곡이라고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마도 자신이 만든 곡 중에서 유독 아끼는 곡이었던 거겠지. 어쩌면 박정현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곡인지도 모르겠고.
박정현이 처음 제목을 붙인 의도는 내리는 비(Rain)에 조사 '가'를 붙인 단순한 이유였다지만, 훗날 음원사이트에서 슬픈 노래를 뜻하는 비가(悲歌)로 해석하여, 일부 유튜브 등에서는 'Sad Song'으로 번역되기도 한단다. 사람들 생각이 다들 비슷한지 나 역시 처음 <비가>를 들을 때에는 이런 중의적 해석이 가능한 곡이라고 여겼다. 'Sad Song'으로 번역 가능할 수 있을 정도로, 이 곡이 가지고 있는 감성이 무척이나 구슬프기도 하고.
화자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시점은 맑은 어느 날이지만, 이야기의 대부분이 비 내리던 과거에 있다 보니 곡 전반에 걸쳐 그날의 분위기가 연출된다. 하늘에선 천둥이 치고,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과 투둑투둑 내리는 빗소리들. 어쩐지 그 소리들 사이로 울면서 뛰어가는 화자의 뒷모습이 보일 것만 같다.
여러 가지 이별의 방식 중에서 '잠수이별'만큼 무책임한 것이 있을까. 아무리 이별의 말이 꺼내기 어려운 것이라 하여도, 한때나마 사랑했던 이를 생각한다면 물론 얼굴을 보고서 헤어짐을 고해야 하는 게 아닐까. 어릴 때는 그게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당연 치 않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살면서 몇 번의 만남과 헤어짐을 겪으면서 잠수이별까지는 아니더라도,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헤어져야만 했던 일들이 분명 내게도 있었다. 얼굴을 마주하는 대신 우리는 전화로, 메신저로, 문자로 그렇게 잘도 헤어졌다. 내가 이별의 발신자였든, 수신자였든.
그래서인지 <비가>의 화자와 마찬가지로, 먼저 이별을 말하고자 하는 입장이 되면 상대방을 마주하기가 몹시 힘들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건 때로 미안한 감정이기도 했을 테고, 어쩌면 이제는 더 이상 보기 싫다는 미움의 감정이기도 했을까.
어쩌면 현실이 지나치게 끔찍해서 이런 잠수이별의 방식이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가끔 이별을 고하는 이에게 심심찮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건을 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이별 앞에서 손목을 긋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하니까. 이런 끔찍한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사랑이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기도 한다. 이런 끔찍함들도 과연 사랑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다만 <비가> 속에서 노래하는 화자가 이런 끔찍한 현실의 주인공들 같지는 않을 것 같다. 사실은 비에 젖으면서까지, 일부러 카페 근처에 먼저 도착해서는 그를 기다렸던 사람이니까. 그녀는 정말로, '이별의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서, 그게 너무너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잠수이별의 방식을 택한 게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