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부천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 나타난 배우 두 사람을 보고 마음이 찡했던 일이 있다. 바로 안성기와 박중훈. [칠수와 만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투캅스] 같은 영화에서 함께 호흡하며, 마치 한국영화사에서는 영혼의 콤비 같은 모습을 보이던 둘 아닌가.
무엇보다 그 둘의 모습이 찡했던 데에는혈액암이라는 병마와 싸우며 예전에 비해 조금 야윈듯한 안성기와 여전히 예의 환한 웃음을 보이며 안성기의 팔짱을 끼고서 케어하는 듯한 박중훈의 모습에서, 각자 매니저와 가수의 역할을 분했던 [라디오 스타]가 떠올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영화에서 박중훈을 챙기던 건 늘 안성기의 몫이기도 했고. 오랜 시간이 흘러, 영화와는 달리 안성기를 챙기는 박중훈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게 찡함을 느꼈을 거라 생각한다.
가끔은 전문가수가 아닌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즐거울 때가 있다. 그러니까 배우 같은 직업군의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들. 젊은 시절의 김희애가 부르던 노래를 좋아하고, 그다음 세대로는 박신혜의 목소리가 좋았다. 이성경의 노래 실력도 대단하고. 그리고 남성 배우 중에서는 영화 [라디오 스타]에서 가수 최곤 그 자체를 연기했던 박중훈의 <비와 당신>을 사랑한다.
영화 속 가수 최곤은 88년 <비와 당신>을 통해 그 해 가수왕을 차지한다. <비와 당신>은 그런 시대를 반영해 조금은 예스러운 느낌의 곡으로 만들어져서, 실제로 영화가 개봉했을 때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박중훈이 부른 곡이 옛 곡을 커버했을 것이란 오해를 하며 난데없이 원곡을 찾아 헤매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비와 당신>은 그야말로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오리지널 트랙이었다. 90년대 중반 이승열과 함께 '유앤미 블루'로 활동했던 방준석이 곡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곡에서 풍기는 예스러움이 자연스레 이해가 되기도 했고.
역시나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기도 했던 밴드 노브레인과 럼블피쉬, 변진섭, 조장혁, 이무진 등 많은 뮤지션들이 이 곡을 불렀지만, 희한하게도 이 곡만큼은 전문 가수가 아닌 배우 박중훈의 버전이 가장 애절하고 아름답다. 이제 당신이 그립지 않다고 또 보고 싶지도 않다고 호기롭게 노래하지만, 비가 오면 눈물이 난다는 화자는 결국 당신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여전히 마음 아파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지나가버린 옛사랑을 잊지 못하는 기억이, 영화 속에서 한 때 인기를 구가했던 최곤의 처지와도 몹시 닮았다.
영화에서 가수 최곤이 라디오를 진행하는 도시는 강원도 영월이다. 영화를 보고서 몇 년이 지난 어느 겨울, 당시 사귀던 애인과 함께 밤기차를 타고서 영월을 찾은 적이 있다.
도착 다음날 안전모를 쓰고서 고씨동굴에 가보기도 했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주 오래된 다방 앞에서는 한참을 들어가 볼까 말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영월에는 천문대도 있었는데 들어가 보진 못했다. 아마도 영월의 밤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있는 거겠지.
추운 겨울이고, 차도 없이 간, 생전 처음 접한 도시에서 우리는 한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단종의 무덤이라는 '장릉'을 향해 걸을 때에는 차가 쌩쌩 지나는, 경사가 깊은 차도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걸어야 하기도 헸다. 그때 아무런 군소리 없이 걸어주었던 애인을 보면서, 이 사람하고는 오랜 시간 함께 걸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월에서 함께 걸었던 그 사람과는 지금까지도 함께 지내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요즘엔 조금만 걸어도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인다. 힘을 내라구, 우리 잘 걸었잖아.
영월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단종의 유배지였다는 청령포였다. 육지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만 했던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뒤로는 암벽이 솟아, 이곳이 왜 유배지로 쓰였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런 유배지로써의 고립성과는 달리 우거진 소나무숲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지금 생각하면 청령포에 들어가 둘러보면서 느꼈던 감정이 꼭 박중훈이 부른 <비와 당신>과도 닮은 듯하다. 몹시 슬프지만, 또 너무나 아름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