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비와 음악 04화

아무런 이유가 필요 없는 일

녹두 - 비 오는 밤이니까요

by 이경



소셜미디어를 하는데, 한 출판사 대표님이 댓글을 달아주셨다.


'작가님 글은 한량스러운 유머가 있어서 좋아요. 그 유머가 냉소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정겨운 관심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되고요. 그리고 가끔 무엇인가에 깊숙이 들어가 탐구하는 진지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쓴 책을 읽어보신 건 아니었고, 소셜미디어에 쓴 글만 보시고는 해 주신 이야기였는데도 뭔가 허가 찔린 느낌이었다. 고백하자면 뒤에 해주신 이야기들은 모두 과찬이었던 거 같고, 나는 "한량스러운 유머"라는 대목이 마음에 꼭 들었다. 아니, 어떻게 아셨지.


한량의 삶이란 얼마나 부러운가. 일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갖추었다면 나는 분명 뒷짐 쥐고, 콧노래 부르며, 동네나 어슬렁거리면서 지내는 한량의 삶을 살았겠지. 현실에서는 그런 한량의 삶을 살지 못해 글로써나마 한량스러운 유머를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이렇듯 한량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해왔다. 지금도 여전히 한량의 삶을 꿈꾸고. 어릴 적 <개미와 베짱이>를 보면 다들 열심히 일하는 개미를 응원하던데, 왜. 나는 밤낮으로 바이올린 켜면서 노래 부르던 베짱이가 더 멋있어 보이던데. 아티스트의 길은 멀고도 험한 거라고.


그래서인지 글을 쓸 때 이런 삶의 자세가 꼭 유머가 아니더라도 드러날 때가 있다. 그런 발현은 단어를 통해, 문장을 통해, 문단을 통해 이루어진다.

어느 해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책을 쓰고 편집자와 함께 교정을 보다 보면 유독 많이 사용한 단어들이 눈에 띄곤 하는데, 그 해에는 글 속에서 '그저'라는 단어가 많이 보여서 몇몇 '그저'를 빼야만 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저'라는 단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과하게 사용했던 거겠지.


단어 '그저'의 이런저런 사전적 의미에서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그냥'이라는 뜻이 꼭 한량과도 같지 않은가.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고 싶은 날들. 누군가 내가 하는 행동에 이유나 의미를 물을 때,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이라고 답하고 싶은 순간들. 의미나 이유를 대기보다는 그냥 그 자체가 좋은 일들.


뮤지션 녹두가 부른 <비 오는 밤이니까요>를 들으면 이런 한량스러운 모습이 그려져서 좋다. 곡의 화자는 비가 내리는 날, 빨간 우산을 들고 담배를 사러 나가서는,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우산살을 올려다보겠다고 노래한다. 슬리퍼에 넘실대는 빗물을 느끼고, 물 비린내를 맡겠다고 노래한다.

그러다 누군가 이렇게 비 오는 날 밤에 왜 나왔냐고 묻는다면, 화자는 이렇게 답을 하겠다고 한다.


비 오는 밤이니까요.

비 오는 밤이니까요.

비 오는 밤이니까요.


이 곡의 화자가 비 오는 날 밤, 외출을 하는 데에는 이렇다 할 이유가 없다. 그저, 그냥, 그 자체가 좋아서라고 설명하는 수밖에는. 사람들 누구라도 이런 것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움직일 수 있는 일. 그게 좋아서든, 몸에 배어서든.

비 오는 날 밤 밖으로 나가는 일, 길고양이를 쓰다 듣는 일, 김연아가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말하면서 하는 스트레칭 같은 거, 그리고 음악을 듣고서 글을 쓰는 일 같은 거.


녹두가 2018년에 발표한 이 곡의 주제는 '아무 이유 없이 그냥'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디테일 하나하나는 놀랍도록 선명해서 장면 하나하나가 그려지는 듯하다. 빨간 체크무늬의 우산, 슬리퍼에 넘실대는 빗물, 샛노란 불빛 아래, 물 비린내 같은 표현들이 그렇다. '투둑투둑' 같은 빗소리를 가사에 녹여낸 것도 좋고.


곡 초반 비 내리는 소리를 들려주기 시작하면서, 신디사이저를 활용해 곡의 마지막까지 분위기를 이끌어나가는 것도 훌륭하다. 정말 비 내리는 날 담배 한 대 태우면서 듣고 싶어지는 곡이랄까. 뮤지션 이름이 '녹두'라서 그런지, 비와 관련된 음악이 유독 더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고. 너무 아재 개그 같은 이야기일까.

사실, 이 곡이 왜 좋으냐는 물음에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기보다는 '그냥 좋다'라는 답이 가장 어울리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냐면, 비 오는 밤이니까요.


녹두.jpg



비 오는 날 밤에는

빨간 체크무늬 우산을 쓰고

담배를 사러 나가겠어요

우산으로 떨어지는

투둑투둑 빗방울 소리에

우산살을 올려다보겠어요

이렇게 비 오는 날 밤에,

왜 나왔냐고 묻는다면,

짧은 대답을 하겠어요, 왜냐면

비 오는 밤이니까요

비 오는 밤이니까요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슬리퍼에 넘실대는

빗물을 느끼겠어요

후두두 떨어지는

빗줄기 보이는 가로등에 서서

한참을 서 있겠어요

그 샛노란 불빛 아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물 비린내를 맡겠어요 왜냐면

비 오는 밤이니까요

비 오는 밤이니까요

비 오는 밤이니까요

비 오는 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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