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비와 음악 01화

명선과 동휘

김목경 - 추억의 눈길

by 이경



명선과 동휘는 군대 대신 들어간 구로공단 공장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다.


명선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나로서는 아주 뒤늦은 고백 하나를 해야 하는데, 뭐 별거는 아니고 첫사랑과 헤어지고서 내 주변 여성 중 가장 먼저 호감이 갔던 이가 바로 명선이었다는 이야기. 명선은 이런 내 마음을 결코 알 수 없었겠지만.

명선은 공장에서는 드물었던 스물 동갑의 친구이기도 했고, 처음 본 날부터 친구 하자며 화끈하게 말을 놓는 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네모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각이 진 턱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명선이 가끔 어설프고 진하게 눈화장을 할 때면 그 네모난 얼굴 안에서 눈 부위만 반짝거려서 그게 좀 웃기기도 했다.

남부 어느 지방에서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는 명선은 가끔은 느린 사투리로 사람을 웃기다가도, 가끔 일을 하다가 화가 나는 일이 생기면 감정을 숨기지 않고 툭툭 쌍욕을 내뱉기도 했다. 아이구, 지랄 염병하네...

전에는 접해보지 못했던 여성 캐릭터였던 탓에 나는 그런 명선을 보면서 처음으로 느꼈던 것이다. 나 욕하는 여자 좋아하네.


동휘는 나와 명선보다 두어 살쯤 어린 남자아이로 고등학교 취업반을 통해 역시나 돈을 벌기 위해 공장에 들어왔다고 했다. 공장에서 막내뻘인 동휘에게 형노릇을 한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생각하면 그때의 나나 동휘는 그저 모두 어린애들일뿐이었다. 세상 물정 하나 알지 못하는.

그럼에도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사오십대 이상의 아주머니들이었기 때문에 나와 동휘는 자연스레 짝을 이루어 함께 어울리곤 했다. 점심시간에 같이 밥을 먹는 것은 물론이고 회식을 할 때면 옆에 두고서 술을 먹는 사이가 되었다. 동휘는 특히 당시에는 크게 인기가 없던 힙합 음악에 관심을 보여서, 공장에서 음악이야기를 나눌 수 있던 거의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동휘와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한 어느 날, 나는 동휘에게 호구조사를 하기도 했다. 그래, 어머니는 뭐 하시니. 아버지는. 늘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던 동휘였는데, 딱 한번 아버지에 대해 물었을 때 동휘의 표정이 굳어지는 걸 보았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동휘는 회사가 쉬는 날이면 수감되어 있는 아버지를 면회하러 간다고 했다. 동휘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지만, 나는 그 후로 더 이상 동휘에게 아버지 일을 묻지 않았다. 사람들은 각자 나름의 사연이 있는 법이니까.


어쨌든 나는 이런 명선과 동휘를 좋아했다. 아마도 명선과 동휘도 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친구로서, 또 형으로서. 서로가 좋아했던 우리 사이와 다르게 명선과 동휘는 서로 사랑을 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내가 참 이렇게나 눈치가 없어요. 둘의 관계가 한참이나 깊어지고 나서야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잘됐다는 마음과 함께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둘 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배신감이 들어서야 되나. 아무렴 축하를 해주어야지. 근데 미리 말해줄 수는 있었던 거잖아. 한동안 명선과 동휘의 관계를 생각하며 이런저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분명 '치기 어리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이었다.


공장에서는 지방에서 올라온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명선은 사랑을 위해서라면 공장에서 제공하는 혜택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명선과 동휘는 연애를 하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옥탑방 하나를 구해 동거에 들어갔다. 나는 이 어리고 젊은 커플이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집에서 함께하기로 한 결심에 경탄하며 찬사를 보냈다.


명선과 동휘가 옥탑방으로 이사를 한 날, 나는 그들의 이사를 도왔다. 사회초년생인 젊은 커플에게 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사를 도와주었던 그날 저녁으로는 명선이 사주었던 짜장면을 먹었던가. 이사로 지친 몸을 쉬며 옥탑방 바닥에 드러눕고 싶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는 내가 오래 머물 곳이 아니라는 생각. 확실히 셋은 외롭다. 나는 명선과 동휘를 좋아했지만, 명선과 동휘가 깊은 사이가 되어갈수록 어쩐지 그들과는 조금씩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명선의 옥탑방에 놓여있던 자그마한 TV에서 기상캐스터가 알려주는 날씨를 보고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TV에서는 남부 지방에서 올라오는 장마전선으로 강한 비바람이 불 것이라고 했다. 옥탑방에서 나온 나는 그 길로 신촌을 향했다. 그때 신촌에는 혼자서 술을 마실 수 있던 리퀘스트 바가 있었으므로. 우산도 없이 신촌에 도착하자 뉴스에 나온 그대로 강한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당시에 나는 머리가 좀 긴 편이었는데,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가 날리기도 했고, 내리는 빗물에는 얼굴이 다 젖어들었다. 신기하게도 가끔 현재의 상태와 꼭 들어맞는 음악이 귀에서 흐를 때가 있는데, 그날의 신촌이 그랬다. 비와 바람에 온몸이 젖었던 그날, 귀에서는 김목경의 <추억의 눈길>이 흐르고 있었다.


<추억의 눈길>은 블루스 뮤지션 김목경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우산도 없이 비를 홀딱 맞았던 그날의 기억 때문일까. 살아생전 김광석이 다시 불러 유명해진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와 기타의 신이라 불리는 에릭 클랩튼(Erip Clapton)에게 헌정하는 트랙인 <Mr. Clapton>이 수록된 김목경의 데뷔 앨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면 <추억의 눈길>이다.


시간이 흘러 동휘는 명선이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고, 명선 역시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치 영원할 것 같아서,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 마저 없어 보였던 두 사람의 뜨거움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던 나는, 이제 김목경의 음악을 통해서만 그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동휘가 결혼하는 날, 신랑 측 부친의 자리에는 누가 앉아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남아 있지만.

말 그대로 이제는 아주 오래된 추억이 되었다.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의.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



김목경 - <추억의 눈길>


이제는 멀리로 떠난 사람

아련한 추억에 묻힌 사람

불어오는 바람에 내 머리를 날려봐도

바람은 나를 두고 멀리 불어가네


이제는 미소도 잊은 사람

가득한 눈길도 잊은 사람

내리는 빗물에 내 얼굴을 적셔봐도

눈물만 흘러내려 앞을 볼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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