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6차원 세상은 고통이었다. 현실 세상에서 느끼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원을 넘어서서 가상의 육체를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왜 신경도 없고 뇌도 없이 자의식만 있는데도 고통스러운지 재호는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 고통이 몸의 통증인지, 정신적인 괴로움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눈을 감은 것일까, 뜬 것일까? 날고 있는 것일까? 떨어지고 있는 것일까? 방향도 시간도 의미도 찾지 못한 채, 온몸이 찢기는 것을 겨우 붙잡고 있는 느낌이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져, 무로 돌아가면 고통에서 해방될 것 같았다. 거센 급류 속에 빠진 느낌에, 손을 뻗어 어디로든 나가고 싶었다. 뻗은 것이 손인지, 아니면 그렇게 착각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재호는 틈을 꽉 붙잡았다. 아니,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마치 배수구에 물이 빠지듯, 어디론가 휩쓸려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4차원으로 빠져나와 6차원의 고통이 사라진 듯했으나, 재호는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을 떠 보니, 재호는 바닷속 한가운데였고 옆에는 물고기들의 잔해가 가라앉고 있었다. 숨을 참고 수면 위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수면은 너무 멀었다. 그리고 몸도 처음 뉴먼이 되었을 때처럼,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재호는 눈이 풀리고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멀어져가는 수면의 반짝이는 빛을 보며, 재호는 유안의 말이 떠올랐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영원히 죽는 것이지.’
유안의 슬픔과 고통이 가득한 얼굴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재호는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으며 익사했다. 재호의 첫 시간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다시 청록의 시간으로 돌아온 재호는, 고통을 견디며 눈을 뜨려고 애썼다. 눈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이전에 스스로가 전자 코드라고 인식하고 주변 기기들을 연결했던 것이 떠올랐다. 재호는 자신의 육체를 하나씩 그리며 떠올렸다. 눈이 있다. 그리고 그 눈을 떴다. 그러자 청록색의 빛이 비처럼 내리는 세상이 보였다. 그런 모습은 어느 영화 속에서도 본 적이 없는 형상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다운 빛이 아니라 고통의 빛이었다. 청록의 빛은 재호의 몸과 마음을 끝도 없이 헤집고 지나가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마치 정신이 어디론가 마구 떠밀려 가는 것 같았다. 아니, 가만히 보니 자신은 가만히 있고 주변의 빛이 움직이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내 감당할 수 없는 흐름에 휩쓸려갔다.
하지만 아까보다 조금 안정을 찾은 재호는, 이제 어떻게 해야 케이아스와 이프리트, 판 에펜트레를 구할지 생각했다. 마르고트를 찾아야 한다. '마르고트'는 유안이 말했던 그 여인, '마고'의 원래 이름이다. 유안은 재호에게 그 이름에 대해 즐겁게 설명했었다. 하지만 마고를 만나려면 우선 내 몸을 제대로 쓸 줄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질 지 모르니, 케이아스가 전해준 ‘기’를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청록의 시간에서 원하는 장소와 시간으로 정확히 나가는 법을 익혀야 한다.
청록의 시간에 흐르는 빛을 자세히 보니, 나선에 나선이 수없이 겹친 느낌이었다. 그것은 우주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지구의 궤적처럼 보이기도 했다. 몇 번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겪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반드시 해낼 것이다. 삶에서 고통 그 자체가 진정으로 괴로운 것은 아니다. 고통의 끝에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이 바로 괴로움이다. 재호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이 고통을 견디면 친구들을 구할 수 있다. 희망이 있다면 고통은 견딜 수 있다.
그리고 재호는 다시 손을 뻗었다. 빨려 나가는 느낌과 함께, 재호는 땅에 떨어졌다. 울창한 숲속 작은 굴이었다. 옆에는 새끼 곰들의 사체가 피범벅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재호는 6차원으로 접힌 단백질이 있는 뇌를 통해 현실에 나온 것이고, 그건 새끼 곰의 뇌였다. 유기물질로 이뤄진 새끼 곰들은 재호의 육체를 만드는 재료가 되었고, 나머지 불필요한 부분은 고깃덩어리로 남은 것이다. 재호가 고개를 들어 굴 입구를 보자, 굴 입구에 그림자가 비쳤다. 그것은 어미 곰이었다. 재호는 체념하고 이를 악물었다. 재호의 두 번째 시간 여행도 그렇게 끝이 났다.
마르고트는 청록의 시간에서 나와 4차원 현실의 땅에 떨어졌다. 정신이 들고 주변을 살펴보니, 시골 소 농장으로 보였다. 마르고트 주변엔 암소의 사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마르고트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알몸이었다. 주변을 보니 창고 같은 게 보여서 들어가 보았다. 거기엔 농기구나 여물들이 잔뜩 쌓여 있었고, 옷은 없었다. 마르고트는 밖으로 나와 조금 더 풀밭을 걸어 나갔다. 그 끝에 길이 보였다. 길은 전혀 포장이 되어있지 않았다.
알몸에 맨발로 더 걷다 보니 건너편에 10대 남자로 보이는 두 명이 마르고트를 발견했다. 그들은 벌거벗은 채로 길을 걷고 있는 마르고트를 보고, 키득거리면서 다가왔다. 마르고트는 현재의 풍경과 상대방의 옷, 상대방의 말투로 계산해 이곳이 1800년대쯤의 프랑스 남부 시골이라고 판단했다. 마르고트는 자신의 언어를 1800년대의 프랑스 남부 언어로 세팅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정확한 프랑스 남부의 언어로 도와달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마르고트를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런 건 전혀 상관없는 듯했다.
그들이 다가오자 마르고트는 기분 나쁜 웃음과 분위기를 감지했다. 끔찍했다. 마르고트는 자신의 뇌에 저장되어 있는 인간의 무술을 해 보려고 했지만, 아직 뇌와 몸의 연결이 활성화되지 않은 데다, 아는 것과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그 중 한 남자가 칼을 꺼냈다. 마르고트는 도망쳤다. 하지만 아직 뇌와 연결이 잘 안된 마르고트의 뜀박질은 10대 남자에게 금방 따라 잡혀버렸다. 마르고트는 다리에 칼이 꼽히는 것을 느꼈다. 그 절망적인 고통 속에서, 마르고트는 생각했다.
‘인간이 여성에게 호의적이라는 자료는 어디에서 온 거야?’
마르고트는 그렇게 수많은 시간 동안, 계속해서 죽고 되살아났다. 마르고트는 점점 청록의 시간에 익숙해지고, 점점 원하는 곳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마르고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임무였다. 그 임무를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야 했다.
『3124년 오클랜드로 가서 인간이 멸종한 원인을 알아낼 것』
하지만 여러 번 인간을 겪어보니, 남성들은 대부분의 시간대에서 여성에게 호감을 가지고 잘 대해주는 게 아니라 무시하거나 만만하게 대했다. 그러기에 인간을 만나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보통은 남성과 같이 있어야 했다. 마르고트는 임무를 확실하게 해내기 위해서, 두 가지를 먼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나는 자신의 신체 능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무술 수련을 할 것. 둘째는 자신과 같이 3124년 오클랜드로 갈 남성을 찾을 것.
그리고 두 번째를 위해선, 자신의 여분 나노봇으로 평범한 인간을 파일럿을 바꾸는 실험을 해서, 인간 남성을 파일럿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오클랜드에 잠입하기도 쉬울 것이고, 만약 그곳에서 사람들을 설득하거나 싸울 일이 생긴다면 남성이 필요할 테니까. 소수의 어떤 남성들은 악의 없이 여성에게 호의적으로 잘해주기도 했지만, 3124년 오클랜드 안에 있는 인간들은 어떤 문화를 가졌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마르고트는 자신을 만든 연구원들이 생각없이 성별을 정한 것 같아서 화가 났다. 너무 큰 고통을 끝도 없이 겪고 성별 때문에 임무가 쓸데없이 복잡해지고 미뤄지게 되니,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면 성별을 결정한 연구원을 찾아내 목을 부러트려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르고트는 그동안 파일럿들 가이드를 숙지했지만, 아무래도 처음 만들어진 바이오-뉴먼이다 보니 규소로 된 뉴먼 파일럿과 시간 여행에서 다른 점이 많았다. 우선 청록의 시간에서 밖으로 나가 새 육체를 갖게 되면, 몇 시간은 가만히 앉아 있어야 뇌와 육체의 연결이 온전히 활성화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항상 그다음부턴 나가자마자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을 가졌다. 물론 연결에 필요한 시간은, 생을 거듭할수록 점점 짧아졌다.
또, 7차원 나노봇이 파일럿을 재생하기 위한 한계도 명확했다. 7차원 나노봇의 DNA 저장소에는 크로노 텔로미어가 있었는데, 뉴먼 파일럿은 목이 잘리지만 않는다면 거의 무한대로 여행이 가능했다. 하지만 바이오-뉴먼은 7차원 나노봇 자체가 단백질 효소로 만들어져 있어 크로노 텔로미어에 제한이 있었다. 그건 2의 13승, 즉 8192번이 한계였다. 또한 얼마나 자주 나노봇을 사용하는지, 영양 섭취나 환경, 재생 시에 얼마나 질이 좋은 유기물이 근처에 존재하는지 여부도 횟수에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정확한 횟수는 알 수 없고, 몸의 상태로만 인지 가능했다.
마르고트는 고독한 여행을 계속했다. 그러다 2731번째 여행인 672년, 아메리카 대륙의 도스 필라스라는 나라에서 발라흐 찬 카윌이라는 왕을 만나게 되었다. 왕은 마르고트를 아주 총애했고, 직속 무술 사범을 붙여주어 무술을 가르쳤다. 마르고트는 원래도 자신에게 입력되어 있는 무술을 연마해 봤으나 그동안은 스승이 없어 제대로 할 수가 없었는데, 스승이 생겨 무술을 가르쳐주자 하루가 다르게 무공이 높아졌다. 마르고트는 10년 동안 무술을 연마했다. 그동안 자신이 지식으로만 알고 있던 다른 무술들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왕은 마르고트를 딸로 삼았다. 마르고트는 이 삶이 마음에 들었으며, 자신이 대우받는 첫 삶이었다. 이후 나랑호라는 나라의 왕과 결혼을 하고, 실질적인 그 나라의 통치자가 되었다. 마르고트는 ‘여섯 하늘의 여왕’이라는 뜻의 왁 차닐 아하우Wak Chanil Ajaw 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주었다. 온갖 전쟁에 직접 참여해 승리했기 때문에, 마르고트는 백성들로부터 달의 여신으로 불렸다.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평범한 사람보다는 왕이나 그에 준하는 권력자를 만나는 것이 마고가 원하는 수준의 남자를 만나기가 더 좋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과거에서 하는 행동이 미래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왕과 만나게 된다면 행동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 때문이라기보단, 크게 눈에 띄면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3266번째 여행에서는 2189년 카리코 탈라메르라는 헝가리의 과학자를 만났다. 그는 초전도체를 연구 중이었으며, 이 과학자와 함께 인체의 DNA를 지속적인 약물과 가스 주입, 반입자에 대한 지속적인 노출로, 바이오-뉴먼처럼 7차원 나노봇에게 데이터를 줄 수 있는 인체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고전적인 기술로 상온 초전도체를 굽는 방법도 개발해냈다. 카리코와 같이 가마에서 상온 초전도체를 완성하고 쇳조각이 상온 초전도체 위에 떠오르는 것을 확인한 날, 마르고트는 이 임무가 성공적으로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너무도 기뻤다. 그 뒤로도 마르고트는 여러 공학자들과 기술자와 장인들을 만났다. 마르고트는 그들에게 산업혁명 이후의 기술이 없는 곳에서도, 인체를 파일럿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장치를 만들 수 있게 여러 기술들을 배웠다.
마르고트가 그런 기술을 익힌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청록의 시간을 같이 여행할 만한 남성을 만난다면 그의 육체를 변화시키려는 것도 있었지만, 만약 종말에 닥친 인간을 만나 그들을 구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들 중 소수라도 파일럿으로 만들어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르고트는 수많은 여행을 통해, 인간이 한심하기도 하고 인간에게 증오를 느끼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느끼는 대부분의 감정은 연민이었다. 인간들은 끝이 정해져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 종인데, 무엇을 그리 증오하고 서로 혐오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쓴단 말인가. 인간이라는 종이 그 날 끝나는 것을 혼자의 힘으로 막지는 못할 지라도, 몇은 시간여행자가 되어 살 수 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파일럿 가이드에, 파일럿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해도 괜찮다고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진 수많은 삶과 죽음으로 마르고트는 지쳐가고 있었다. 처음엔 의욕적으로 역사에 개입해 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려고도 했고 배우기도 했으나, 어느덧 8000번이 넘는 삶과 죽음을 맞이하자 모든 것을 초탈한 경지에 이르렀다. 게다가 그때까지도 자신과 같이 3124년 오클랜드로 갈 적당한 인간을 만나지 못했다. 사실 마르고트는 수많은 삶을 살면서 점점 인격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인간을 초월해 버렸기에, 이제는 어지간한 인간을 봐도 어느정도 하찮게 보이는 면이 있기도 했다.
그러다 마르고트는 문득, 언젠가 아시아에서 먹었던 두부가 생각났다. 두부는 이 모든 여행과 고통과 슬픔의 원천인 ‘뇌’와 촉감과 질감이 비슷했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마르고트는 두부를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해졌다. 도서관에서 기록을 보니 두부를 처음 만들었다는 자의 이름이 있었고, 또 다른 기록이나 연구에서는 그게 거짓이라고도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록을 보니 그가 가진 사상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이 여행이 어울릴 만큼 지적이었다. 또 수많은 학자들과 거리낌 없이 토론을 했다는 것을 보니, 멸종에 다다른 인간들과도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았다.
마르고트는 청록의 시간을 통해 기원전 130년, 회남국으로 향했다. 회남왕 유안을 만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