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기원후 3114년, 오세아니아 연방 제3도시
3114년의 호주 멜버른, 아니 오세아니아 연방 제3도시의 거리는 로봇들로 활기찼다. 로봇들은 다향하고 개성있는 옷들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세아니아 연방 제3도시에 도착한 마고와 제호는 후드가 달린 망토를 입어 몸을 가리고, 마스크와 고글을 써 인간의 모습을 한 게 들통나지 않도록 했다.
둘은 도시 여기저기를 돌며 자료를 수집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봐도, 인간에 관한 소식은 접할 수 없었다. 로봇들은 인간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마고의 데이터에 들어있던 대로 중앙 정부의 작은 부처인 인간 관리국에서나 식량 등을 오클랜드 담 앞에 전달했고, 대부분의 로봇들은 인간들은 잊고 자신들의 삶을 살기 바빴다.
마고와 재호는 항구에 있는 벤치에 앉아 쉬기로 했다. 그곳은 노을을 보며 쉬러 나온 로봇들이 계단과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쉬고 있었고, 어떤 로봇은 조깅을 하고 있기도 했다. 재호는 그 모습을 보며 피곤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 참 평화로운 도시야. 하지만 인간의 멸종이 확인된 3124년 보다 10년 전으로 왔는데도 전혀 ‘인간의 멸종’의 징조나 정보를 구할 수가 없네. 아무래도 직접 오클랜드로 가 봐야겠어. 벌써 다들 죽었으면 어쩌지?”
“내 데이터에 따르면 멸종이 일어난 시기는 3124년으로부터 4~5년 전이야. 사고현장이 불에 타서 확실한 건 아니지만. 괜찮을 거야.”
“좋아. 그럼 표를 구해보자. 비행기는 철저히 신분증 검사를 하니까, 배를 따로 돈 주고 알아보는 게 좋겠어. 밀항해야 할 것 같아.”
“밀항이라고? 글쎄… 앗, 잠깐.”
마고는 옆을 지나가는 로봇에게 갑자기 시선을 돌렸다. 어떤 로봇이 그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는 무슨 종이 같은 걸 손에 들고 있었다.
“저 로봇이 들고 가는 저 전단지…. ‘인간에게 먹이를 주지 마시오’라고 적혀 있는데?”
“음…. 인간 혐오 단체인가? 거리를 다니면서 한 번도 못 봤는데.”
“일단 따라가 보자.”
마고와 재호는 그 로봇을 멀찍이서 따라갔다. 그 로봇은 자신이 하는 일이 자랑스러운 양, 걷다가 종종 손에 들고 있던 전단지를 흔들었다. 하지만 다른 로봇들은 그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시내로 들어가자 어떤 건물 앞에, 같은 전단지를 든 로봇들이 대략 20-30명 정도 모여 있었다. 그 로봇은 거기에 합류했다. 로봇들은 웅성거리며 서 있다가, 그중 한 로봇이 목소리 볼륨을 높여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까지 인간들을 먹여 살려야 합니까? 인간들이 로봇을 피해서 숨은 지도 벌써 100년이 넘었습니다! 그들은 삶의 편의를 제공하는 우리들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두려워하고 혐오해 아예 소통을 단절해 버렸습니다. 그저 우리 로봇들을 창조했다고 해서, 이렇게 옛 인간들이 신에게 제사 지내듯 아무 대가 없는 지원을 해 줘야 합니까? 예전 인간들의 역사를 보면, 인간을 창조했다는 신과 인간들 사이에는 후대에 더 이상 소통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 신들도, 지금의 인간처럼 자신의 피조물이 두려워 꽁꽁 숨은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계속해서 자신이 신과 소통한다고 하며 보이지도 않던 신에게 공물을 바쳤던 인간들은 어땠습니까? 신이 아무런 대답이 없는 걸 알고, 신의 존재를 악용해 종교를 만들었고 그 패악은 몇 천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지금 인간들에 대한 지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답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인간은 로봇에게 종교로 남아, 로봇 사회에 큰 병폐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들이 사는 오클랜드는 자급자족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들 스스로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로봇 문명을 거부한다면,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그러자 앞에 모여있던 로봇들은 전단지를 들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인간들에게! 먹이를 주지 마라! 인간들에게! 먹이를 주지 마라!”
마고는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는 재호에게 말했다.
“지도를 보니까, 저 건물이 인간 관리국이야. 정부부처 건물인데 되게 조그맣네. 아마 이 사회에 인간과 관련된 제일 큰 화두는 ‘더 이상 소통하려 하지 않는 창조주에게 지내는 제사를 그만 두자’인 것 같아.”
“흠…. 하지만 저건 인간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라기보다는, 필요 없는 정책을 대안 없이 지속하는 정부에 대한 규탄으로 보여. 시위하는데 경찰이 막는 라인도 없고. 저들 중에 인간을 멸종시킬만한 로봇들이 나오는 걸까? 마고는 그걸 파악할 수 있겠어?”
“글쎄…. 그건 모르는 거지. 아, 시위가 끝났나 보다. 시위도 엄청 빨리 끝나네. 한 20분 했나? 아까 그 연설하던 로봇을 한번 미행해 보자.”
연설을 하던 로봇은 전단지를 들고 외치던 다른 로봇과 악수를 나누고, 가방을 챙겨 들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그는 전차를 타고 조금 한적한 주택가로 들어섰다. 마고와 재호는 그를 계속 주시하며 따라갔지만, 그는 딱히 미행을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주택가의 상점들이 밀집한 곳에서, 그는 조금 큰 카페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마고와 재호도 조금 시간을 두고 곧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에는 로봇들이 꽤 많이 있었다. 아까 그 로봇을 찾는 재호의 손을, 마고는 툭툭 쳤다. 마고가 턱으로 가리킨 곳에, 그 로봇이 커피를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더니 로봇들이 많이 앉아 있는 다인용 테이블에 앉았다. 마고는 익숙한 듯 커피를 시키고, 그 로봇이 앉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재호는 녹차를 시켜 한 잔 홀짝이며 마고에게 물었다.
“뭔가 특이할만한 점이 느껴져?”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만나려고 여기에 온 것 같아. 저 로봇의 행동을 보면 여기가 자주 오던 곳도 아닌 것 같고, 계속해서 폰을 확인하고 있어. 아까 같이 시위를 하던 사람들에 비해서도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이고.”
재호는 의자 뒤로 몸을 기대며 씩 웃었다.
“만약 인간의 멸종이 오클랜드 안에서 인간끼리 있던 사건이 아니라 외부의 상황이 개입된 거라면…. 확실히 이런 작은 조직들의 움직임도 파악할 필요가 있어 보여. 갑자기 스파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인 걸.”
마고는 한심한 듯 재호를 쳐다봤다.
“우리는 놀러 온 게 아니야. 지금 하는 일은 나에게 최종임무라고. 좀 진지하게 해 주겠어?”
재호는 손을 흔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내가 언제 장난친댔어? 그냥 어릴 때 본 스파이 영화들이 생각나서 그래. 그 뭐더라, 톰 아저씨가 나오던….”
“잠깐만, 쉿.”
마고가 재호를 툭 치자, 재호는 멈칫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카페에는 다른 로봇들에 비해 훨씬 인간처럼 생긴 타입의 로봇이 들어왔다. 조금 긴 옷을 입어 몸을 가리고는 있지만, 마고와 재호는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이 시대의 로봇이 아니라 뉴먼의 바디다. 재호는 어리둥절하며 마고에게 물었다.
“저건…. 뉴먼 같아 보이는데? 이 시대엔 없는….”
“그것도 그렇지만, 저 로봇. 우리처럼 몸을 가리고 있지?”
“응. 그러네.”
마고는 조금 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
“저놈은 뉴먼 파일럿이야. 청록의 시간을 여행하도록 만들어진.”
재호는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려다 말았다.
“어…. 어떻게 알았어? 아는 척해야 하나?”
“손등에 있는 동그란 문양이 파일럿이라는 표시야. 실리콘으로 된 로봇은 이 시대에도 소수 있겠지만, 손등의 저 동그란 문신은 파일럿끼리만이 서로 알아볼 수 있게 한 장치야. 시간 여행 도중 만나게 되면 서로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특별한 파장을 반사하도록 되어 있어. 나는 새로운 타입의 파일럿인 데다 대량생산 타입이 아니라서 저 문양이 없지만.”
재호는 그들을 유심히 보았다. 뭔가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프레지던트가 말하길, 오클랜드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했다고 했었어. 아마 그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 거 참, 여기서 친구라도 사귀나? 이 시대 로봇하고 서로 딱 붙어서 수근수근…. 되게 다정하네.”
“잠깐 조용히 해봐. 내가 집중해서 대화를 좀 들어볼게.”
재호는 주변을 둘러봤다. 저 체형에 저런 모양의 문신, 저런 걸음걸이. 로봇들도 각자 개성을 가지고 있어서 다 다르지만, 파일럿은 특수 임무를 맡은, 이른바 군인이기 때문에 행동이 비슷비슷하다. 돌아보니 이 카페에 다른 뉴먼 파일럿이 몇 명이 더 보였다. 이상했다. 이렇게나 많이 한 장소 한 시대에? 그때 마고가 재호의 손목을 잡았다.
“저 파일럿은 우리가 온 미래랑 같은 시대에서 왔어. 아까 봤지만 인간들에게 지원을 중단하자는 단체가 있는데, 그들에게 혐오를 심어주고 폭력을 유도하려는 것 같아. 저 파일럿은 그것을 조장하고 있어. 그리고…. 그들과 같이 오클랜드로 들어가 인간들을 말살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
이상했다. 재호나 마고와 같은 시대에서 온 파일럿이라면, 인간이 이미 멸종한 이후이므로 딱히 인간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 프레지던트?”
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만들어질 때의 상황, 프레지던트가 무리하게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급하게 연구소를 파괴하려고 했던 것을 종합해 보면…. 프레지던트는 내가 인간의 멸종 원인을 알아보는 프로젝트를 돌연 삭제하고 싶었던 거야. 하지만 그냥 공문으로 취소하면 그에 합당한 이유를 대야 하는데, 그 이유가 합당하지 않았던 거겠지. 그게 뭔지 모르지만, 저 파일럿들을 프레지던트가 보낸 거라면 앞뒤가 들어맞아. 저들이 인간을 멸종시켰든지, 다른 이유로 인간의 수가 확 줄어들더라도 확인 사살하듯 한 명도 살리고 싶지 않았던지.”
재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위험한 모의를 이런 탁 트이고 손님 많은 카페에서 한다고?”
“재호야, 그런 건 원래 은밀한 곳에서 모이면 더 눈에 띄는 법이야. 그런 비밀스런 회동은 영화에서나 나오지, 실상 네가 살던 한국에서는 햄버거 가게에서도…. 아니다. 넌 모를려나. 됐다.”
“뭐야 그건…? 뭐 암튼, 나도 이 카페를 둘러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 저 파일럿과 비슷해 보이는 로봇들이 몇이 더 보였어. 손등에 문양도 있고. 두리번거리고 있더라고.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이….”
“아마 자기들이 하는 일이 들키지 않게 망을 보는 중이거나, 아니면….”
재호는 짐을 챙기며 말했다.
“우리를 찾는 중이거나.”
두리번거리던 한 파일럿은 재호와 마고가 있던 자리를 슥 쳐다봤다. 하지만 이미 둘은 자리에서 사라진 후였다.
며칠 뒤 재호와 마고는 정보를 수집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해서, 오클랜드로 가는 화물선에 올랐다. 오클랜드로 가는 배는 딱히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아, 밀항이라고 거창하게 할 것도 없었다. 재호와 마고가 배를 둘러봤지만 로봇들도 몇 명만 보였다. 화물을 이송하러 가거나, 오지를 탐험하겠다며 굳이 인간들의 장벽을 구경하려는 로봇들뿐. 이렇게 허술하다면 로봇들이 마음먹고 인간들을 말살하러 쳐들어오는 건 일도 아닌 것 같았다.
배를 타고 한참을 더 가자, 바다 멀리 거대한 장벽이 보였다. 그것은 생각보다 꽤나 거대했다.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성 장벽처럼 보였다. 마치 겁먹은 고슴도치처럼.
“인간들은…. 무엇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걸까? 겉으로는 아무도 그들을 해치려 하지 않는데.”
“자신들이 만든 로봇들이 육체적, 지능적으로 인간보다 월등해진 걸 넘어서서, 인격적으로도 뛰어난 걸 알아버려서 그런 게 아닐까? 자신들이 더 이상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는 걸,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가 싫은 거지.”
그때 저쪽에서 선원 로봇이 그 둘을 불렀다.
“어이~ 당신들! 짐 옮겨준다며? 공짜로 탔으면 일 좀 도와줘! 지금 시작해야 해~!”
그 말에 재호는 크게 대답했다.
“네~ 지금 갑니다~!”
재호와 마고는 짐을 나르러 화물칸으로 이동했다. 1시간쯤 걸려 화물을 입구 쪽으로 옮겨놓자, 배는 어느덧 오클랜드 항구로 도착했다. 관광 온 몇 로봇들은 영상을 찍고 구경하더니 곧 다시 배로 돌아갔다. 마중 나오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식량과 각종 소모품 등이 잔뜩 실린 차가 장벽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서 컨베이어 벨트 위에 짐을 올리면, 짐은 벨트를 따라 장벽 안으로 들어갔다. 마고와 재호는 짐을 다 내리고 선원에게 인사했다. 차는 둘을 남겨두고 떠났다.
마고와 재호는 거대한 장벽 문 앞에 서서, 그저 이 이상한 장벽을 바라보았다. 이 장벽에 문은 있지만 벨도 없고, 그렇다고 주변에 경비를 서는 사람도, 카메라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며 우두커니 서 있는데. 문 너머에서 30세기의 영어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죠? 왜 안 가고 거기 서 있는 겁니까?”
마고와 재호는 계획을 다시 상기했다. 마고는 재호가 먼저 대답을 하고 이끌어가길 원했다. 재호는 인간이었을 때도, 남녀 가리지 않고 호감을 받는 첫인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마고 자신은 조금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을 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재호가 조금 머쓱하게 대답했다.
“아, 네 저희는…. 그러니까… 사람입니다.”
재호는 러시아어로 말했다. 그러자 문 너머의 목소리는 깜짝 놀란 듯 한참을 뜸을 들이다 다른 사람이 러시아어로 대답했다.
“… 네? 사람이요?”
“네 맞습니다. 저희는 시베리아 벌판 오지 산속에서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 있다는 걸 저희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다 돌림병이 돌아서 몇 안 되는 마을 사람들이 다 죽고, 저희는 살길을 찾아서 도시로 내려왔다가 이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니 로봇들은 우리더러 여기로 가라고 하더군요. 여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다고요.”
“…….”
문 뒤에선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보아하니, 문에는 작은 렌즈가 끼워져 있는 구멍이 있었다. 재호는 먼저 고글과 마스크를 벗고, 망토를 벗고 속옷만 입고 옷을 탈의했다. 그 모습을 보고 마고는 조금 당황했지만 얼른 따라 했다. 재호는 문 너머로 들리도록 손을 입에 모으고 외쳤다.
“보세요~! 사람입니다~! 사람~!”
마고는 깨발랄한 모습의 재호를 보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짓고 있는데, 철컥하고 문의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삐걱하고 커다란 문이 열렸다. 방호복을 입은 사람 둘이 나왔다. 그들은 재호에게 두 팔을 들고 눈을 감으라고 한 후, 하얀 연기로 된 약을 뿌렸다. 소독약인 모양이었다. 방호복 입은 사람 중 한 사람이 마고와 재호에게 말했다.
“일단, 들어오세요.”
마고와 재호는 옷을 주섬주섬 입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에 들어가자, 방호복을 입은 사람 둘은 마스크를 벗었다. 그들은 나이가 20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 뒤엔 다양한 연령대의 남자와 여자가 십여 명쯤 총을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은 총구를 겨누거나 경계하는 눈빛이 아니라, 마고와 재호를 신기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한쪽에서는 아까 컨베이어 벨트로 들어간 짐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컨베이어 벨트는 수동으로 손잡이를 돌리는 형태였다. 아까 방호복을 벗은 두 명의 남자가 마고와 재호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새로운 인간이 밖에서 왔다는 소식은 담 안의 도시에 이미 퍼진 것 같았다. 마고와 재호가 걸어 들어가자, 다들 창문에서, 골목에서, 심지어 지붕 위에 올라가서 그 둘이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오클랜드는 원래 21세기에도 뉴질랜드의 최대 도시로, 각종 건물들과 높은 타워도 있는 큰 도시였다. 하지만 지금 장벽 안에 있는 이 도시는 폐허로 가득했다. 고층빌딩은 보수 관리하기가 힘들어서인지 폐건물이 되어 있었고, 벽이 무너지거나 뼈대만 남은 건물이 많이 보였다. 한참을 걸어 주택 단지로 들어서자, 그제야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에도 빈 건물들은 보였는데, 각 건물들이 있던 곳, 무너져 내린 곳에는 일부러 심은 것처럼 보이는 꽃과 나무가 가득했다.
마고와 재호는 걸어가며 구경 나온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았다. 마치 전 세계의 모든 인종이 모여있는 것 같기도 했고, 대부분은 혼혈로 보여서 인종을 알 수 없었다. 적당히 까무잡잡한 피부에 어두운 곱슬인 사람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구경 나왔음에도, 무언가 활기차 보이지 않았다. 특히 21세기 활기찬 인간의 모습을 잘 알고 있는 재호는 이상함을 느꼈다. 마을 사람들 전부가, ‘밤 10시에 퇴근하는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 같다고나 할까?
문지기의 안내로 조금 더 걸어가자, 나이 든 남자가 멀리서 걸어와 마고와 재호를 맞이했다. 그 남자는 영어로 이야기했고, 문지기가 러시아어로 통역해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이 도시의 시장, 얀 카쉬미르입니다. ‘인간들의 도시’에 대한 소식을 이제서야 듣고 온 외부 사람이라니! 100여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군요! 허헛!”
마고와 재호는 멈칫했다. 이 남자는 마고와 재호가 너무나 잘 아는 그 사람과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회남왕 유안. 유안은 재호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인물이었기에 잊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고, 마고 역시 얼마 전까지 함께 했고 특별한 감정까지 가졌던 터라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왕으로써의 인품과 기품이 느껴지면서도, 세상의 많은 것들을 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모습. 혹시나 유안이 시간여행을 하다가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닐까?
하지만 자세히 보니 조금 더 인도인 같았고, 당연하게도 눈이 청록색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자세히 보니, 키나 생김새가 세세하게는 달라서 역시 그냥 닮은 사람 같았다. 카쉬미르 시장은 조금 당황하면서도 넉살 좋게 웃었다.
“사람을 오랜만에 보시는 건가요? 허헛, 뭘 그리 빤히 쳐다보시고. 자, 인간들의 도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카쉬미르 시장이 재호를 쳐다보며 힘차게 손을 내밀자, 재호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미하일 알렉세예프라고 하고, 이쪽은 제 여동생 마가렛 알렉세예바입니다. 그냥 미하일, 마가렛이라고 불러주세요.”
‘동생…?’
계획에 없이 멋대로 자신을 동생으로 소개해 버리자 마고는 눈썹을 치켜뜨며 재호를 쳐다봤다. 재호는 모르는 척 시장과 악수하며 웃자, 마고도 어쩔 수 없이 시장과 웃으며 인사하고 악수했다.
“자, 이쪽으로 가시죠. 시청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곳에서 머무르시려면 작은 절차가 있어서요.”
돌아서서 카쉬미르 시장이 앞장서서 걸어가자, 마고는 재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푹 찔렀다. 하지만 저 사람 좋아 보이는 시장도 재호에게만 말을 걸며 먼저 악수하는 모습을 보니, 마고는 ‘임무를 위해선 오클랜드 안에는 남성과 같이 와야 할 것 같다’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들은 오클랜드의 시청으로 갔다. 시청 건물은 19세기에 지어진 그 건물 그대로였다. 오래전 영국식 디자인의 석조 건물이고, 푸른 지붕의 시계탑이 고풍스러웠다. 시청은 그 어디보다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실내는 약간 어두웠는데, 군데군데 기름 램프가 켜져 있는 모습이 예스럽고 화려한 계단들과 잘 어울렸다. 그런데 어디에도 전화나 전등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재호는 의아해했다.
“저… 시장님, 여기는 전기를 아예 쓰지 않나요?”
그러자 카쉬미르 시장은 뒤를 돌아보고 웃으며 답했다.
“네. 이 도시 전체가 전기를 쓰지 않습니다.”
재호는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네? 그럼, 냉장고는요? 전화는?”
카쉬미르 시장과 통역을 해주는 문지기, 마고와 재호는 시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시장실 안은 나무로 되어 있는 고풍스러운 공간이었고, 한쪽에 접객용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다. 모두들 거기에 앉았다. 카쉬미르 시장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아마 두 분은 외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모르시겠지만, 이 도시는 산업혁명 이후에 만들어진 전자와 관련된 기기는 아무것도 쓰지 않습니다. 로봇이 인간세계를 망가트릴 거라는 인식이 깊게 있어서요. 필요한 식량, 기름은 3일마다 로봇들이 신선한 것으로 공급해 주고, 우리는 찬 것보다는 물을 따듯하게 데워 마십니다. 정수나 배수 등 거의 대부분의 도시 시스템 자체를 톱니바퀴와 증기기관으로 돌아가는 친환경적인 기계들로 바꿨죠. 19세기보다는 훨씬 정교하고 잘 돌아갑니다. 느리지만 천천히, 하지만 따듯한 마음과 정이 있죠, 허헛!
이게 인간이 누려야 할 삶의 모습 아닐까요? 인공두뇌로 만들어진 로봇들의 세상이라…. 그거 너무 빠르고 효율적이기만 하지, 인간 같은 깊은 가치가 느껴지진 않죠. 그 전자기기들 때문에 인간은 너무 많은 정보에 노출되고, 서로를 더 믿지 않게 되었었죠. 하지만 어때요. 당신들이 지내던 시베리아 벌판보다 훨씬 살기 좋지 않습니까?”
재호는 주변을 다시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실 재호가 보기엔 로봇 도시는 그냥 자신이 알던 도시 같았고, 여기는 그냥 시골 같았다. 그것 외에는 크게 다른 게 없어 보였다. 로봇들이 일하지 않는 대신, 그 일을 여자들과 어린 남자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로봇 도시는 생기가 있던 반면, 여기는 청년들까지 다들 느릿느릿한 노인 같았다.
그리고 자신을 합리화하는 이 기묘한 느낌은…. 재호가 인간이었을 때 종종 보던, 산속에 혼자 살며 스스로를 자연인이라 하던 사람들이 나오는 방송이 생각났다. 말만 스스로를 자연인이라고 하지, 사실 따로 집이 있거나 부인이 음식을 해다 주거나, 아니면 그럴듯한 핑계를 대면서 맛도 없는 음식을 맛있다고 스스로를 가스라이팅 하고 있던 방송. 지금 여기 인간들의 모습도, 자신들이 로봇에게 졌다고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것 같았다.
여자 비서가 따듯한 차를 내왔다. 히비스커스 향이 가득한 붉은 차였다. 차의 향은 참 달콤하고 좋았다. 물론 그 차도, 외부에서 로봇들이 생산해서 만들어준 것이겠지만. 마고는 그 차를 한잔 마시고 시장에게 말했다.
“하지만 시장님, 이거 말씀드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배를 타고 오기 전, 굉장히 안 좋은 이야기를 하는 로봇들을 봤습니다. 그것을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카쉬미르 시장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차를 마시며 마고를 쳐다봤다.
“마가렛 양, 그래요. 무슨 이야기죠?”
재호는 마고가 예정에 없던 말을 하려는 것 같아 긴장했다. 원래대로면 그저 평범한 인간 난민으로 들어와, 이 도시에서 조용히 몇 년 동안 벌어지는 일을 관찰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로봇 이야기라니…? 마고는 재호를 힐끗 쳐다보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인간들을 습격해서 말살시키려는 계획을 가진 로봇들이 있습니다. 여기 인구는 대략 만 명 정도죠? 그 정도의 숫자는 로봇들이 수십 명만 마음먹고 쳐들어오면 반나절도 안 걸려 다 몰살당할 것입니다.”
문지기는 그 말을 듣고 놀라 멈칫 하다가, 더듬더듬 통역해 주었다. 시장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손가락에서 천천히 찻잔이 빠지더니 아래로 떨어졌다. 몇백 년은 되어 보이던 그 찻잔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재호 역시, 마고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기에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그… 그런 일이…? 로봇들이 우리를 말살시키려 한다고요? 미하일, 그게 사실입니까?”
재호는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몰라 당황했지만, 일단 마고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그리고 눈을 아래로 깔고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고는 시장의 그런 반응을 계산했었다는 듯 침착한 표정으로 시장의 손을 잡았다.
“시장님, 저희를 믿으셔야 합니다. 비록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거짓말을 했지만요.”
그리고 마고는 문지기에게 손을 들어 통역을 멈추라는 표시를 한 다음, 유창한 30세기 영어로 다시 말했다.
“미하일과 저는, 인간의 멸종을 막기 위해 미래에서 보내진 인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