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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 5. 연민과 믿음

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by 카시모프

해는 어느덧 서쪽 건물 위에 걸려 있었다. 곧 있으면 노을이 지고, 날이 저물 터였다. 오클랜드에서 이전에 없던 긴급 시의회가 소집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인간들은 모두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랐다. 재호와 마고는 따로 시청 응접실에서 기다렸다. 재호는 마고의 폭탄 발언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미래에서 온 인간? 멸종을 막기 위해? 그렇다면 미래가 바뀌는 것 아닌가? 재호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마고. 그렇게 해도 되는 거야? <드래곤 볼>을 생각해 봐. 과거를 바꾸니까 미래가 두 개로 갈라져 버리잖아. 영화에서도 수많은 선택으로 갈라지는 ‘멀티버스’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멸종을 막으면 미래가 망가져 버릴까 봐 걱정되는데.”


마고는 테이블 위에 있는 과자를 까먹으면서 대답했다.


“중앙 뉴먼 연구소와 파일럿들은 시간 여행에 대한 많은 실험을 했어. 그리고 얻은 결론은, 청록의 시간으로 연결된 모든 역사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야. 우리가 시간여행을 하는 순간 미래는 우리의 과거가 돼.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역사가 청록의 시간을 발견하고 시간여행을 하게 된 이유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 어떤 사실을 바꾼다고 해서 미래가 바뀌거나 갈라지지 않고, 설사 달라지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결국 바뀌지 말아야 할 지점으로 수렴하게 된다는 걸 알아냈어. 왜냐하면, 청록의 시간을 발견한 미래가, 과거에서 보기엔 ‘더 과거’인 셈이니까.


예전에 별을 보며, ‘우주를 비스듬히 보고 있다’고 했던 말이 기억나? 우리의 모든 인과도 마찬가지야. 역사는 한 줄의 타임라인이 아니라, 애초부터 출발한 시간과 인과가 제각각인 ‘비스듬한 타임라인’, 혹은 더 나아가서 ‘다양체 구조로 된 복잡한 타임라인’ 안에 있는 거지. 그래서 파일럿 지침에, ‘미래를 신경 쓰지 말고 임무를 위해서 행동하라’라는 게 있어. 어차피 파일럿들은 요원이기 때문에, 임무를 위한 행동이 아닌 다른 행동은 알아서 자제해. 너는 정식 파일럿도 아니고 100% 인공지능도 아니니까 그런 가이드 데이터가 뇌에 없겠지만.


그리고 ‘멀티버스’ 얘긴 하지도 마. 그건 원래 20세기에 미국 코믹스에서 인기 있는 캐릭터를 계속 리부트해 돈 벌려고 만든 상업적 개념이고, 영화에서도 인기있는 배우가 죽어도 또 등장할 수 있도록 만든 아주 좋은 장치였으니까. 그게 과학적으로 말이 돼? 선택을 인간만 하는 것도 아닌데. 선택, 관찰. 이런게 대표적으로 일반인이 오독하는 과학용어지.”


아무리 미래의 인공지능이라지만, 재호는 자신을 무식하다는 듯 가르치는 마고가 조금 짜증났다. 재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고를 흘겨봤다.


“내가 1700년이나 지난 과학을 어떻게 다 안다고, 쳇…. 그럼, 정말 시간 여행자 수십, 수백 명이 마구잡이로 과거를 바꿔도 괜찮다는 말이야?”


마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3700년대의 과학 얘길 하는게 아니라, 네가 알만한 21세기 상식에 맞춰 말하고 있는 거야, 으이구…. 그 많은 생 동안 쌈박질만 하지 말고 공부좀 하지 그랬어. 그리고 네 질문에 답하자면, 음…. 애초에 '과거를 바꾼다'라는 전제가 말이 안되지만…. 그건 아니고, 시간여행 계산에는 마지노선이 있어. 28명의 파일럿이 여행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그 이상 넘어가면 다양체 모양의 타임라인 계산이 불가능해져서, 미래가 바뀌는지 아닌지 예측을 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


공식 데이터에는 다른 모든 파일럿이, 우리가 출발했던 시대보다 1년 전에 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고 되어있었어. 멜버른에서 우리가 확인한 파일럿들은 그 이후에 보내진 것 같은데, 카페에서 본 파일럿은 4명. 그렇다면 지금까지 시간여행을 한 파일럿은 유안과 우리까지 합해서 18명이야. 프레지던트도 마구잡이로 파일럿을 보내진 못해. 파일럿은 항상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고 있는 거니까. 28명이 넘어가면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거든. 과거나 미래가 바뀌는 수준의 문제가 아닐 거야. 아니면, 계산만 불가능하다는 것 뿐이지 여전히 별 문제 없을 수도 있고.


내가 하려는 것 역시, '결과'를 바꿔 만 명의 인간 전체를 구원하겠다는 게 아니야. 미처 몰랐던 '과정'의 일부를 만들려고 하는 거지. 우리가 로봇들과 맞서 싸워서 전쟁을 하게 되면, 로봇 사회 전체가 여길 주목할 거야. 그러면 인간은 더욱 위험해질 거고. 나는 우리가 가진 여분의 나노봇을 이용해, 유안처럼 몇 명을 파일럿으로 변화시켜 살아남게 하고 싶어. 그거면 인류가 여기서 멸종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인류 전체의 역사’라는 타임루프 안에서, 인류는 조금 더 윤회하듯 살아남게 되겠지. 그리고 이 일을 하려면 커다란 기구를 만들어야 해서, 비밀리에 할 수 없기도 하고. 내가 하려는 일이 성공한다면, 그건 일어나야만 하는 일인 거지.”


재호는 그 말을 듣고 한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 ‘청록의 시간’을 산다는 게 너무도 큰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에 그게 정말 좋은 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거라면 멸종했지만 멸종하지 않은 상태이긴 하다. 마고는 과자를 아작아작 먹으며 말을 이어갔다.


“유안처럼 기구를 만들어 인간을 파일럿으로 변화시킨다고 해도, 우리가 가진 여분의 나노봇도 양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7명이 한계야. 7명이 다 성공할 지 알 수 없고. 그러니 그 부분에 있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 혹시 모르니, 여분의 나노봇을 미리 꺼내놓는 게 좋겠어. 머리 뒤에서 꺼내는 걸 보인다면 로봇으로 생각할 테니까.”


마고는 머리 뒤로 손을 가져가더니, 한 스푼 정도 되는 양의 분홍색 젤리 같은 것을 꺼냈다. 재호는 눈이 커졌다.


“어…. 그건…?”


“아, 맞다. 그래. 너에게 주었던 연고가 이거야. 내 뇌의 여분 공간에 들어있던 7차원 나노봇이었어. 그거엔 육체를 재생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상처가 나면 일반 사람보다 빨리 치유가 돼. 그래서 그때 네 상처가 덧날까 봐 조금 나눠 준 거야. 물론 그 정도로 파일럿이 되진 않으니까.”


재호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신이 상처에 발랐던 게 7차원 나노봇이 들어있는 마고의 뇌였다니. 7차원 나노봇은 육체의 정보를 수시로 수집해 나중에 재현할 DNA 설계도를 만들고, 또 자의식과 가상의 육체를 6차원 안에서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는 장치였다. 물론 유안처럼 특별한 시술을 받아야 하지만, 유안은 시술을 받는 동안 환각과 환청에 시달렸다고 했었다.


“7차원 나노봇…? 그… 그게 내 뇌에 어떤 작용을 했던 건 아닐까? 예를 들어 조현병이라거나….”


마고는 가만히 재호를 쳐다보았다.


“흠…. 그럴 수도 있겠네. 당시에는 내가 파일럿으로 변화시키는 기술에 대해서 연구하지 않았어서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완성된 기술을 생각해 보면 그게 뇌 구조를 변화시켜 환각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어. 어쩌면 네 뇌가 청록의 시간을 여행하기에 아주 적당한 뇌가 되었던 것도, 나노봇이 뇌를 어느 정도 변화시켰기 때문일 수도 있지.”


재호는 정말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조현병을 겪으면서 내 인생이 얼마나 피폐해졌던가. 엄마는 나 때문에 끝까지 힘들게 사셨다. 그 뒤에도 내가 조현병을 가졌다는 이유로 계속 이용당했지….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처럼 흥미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긴 하다. 또한 내가 조현병에 걸렸기 때문에 자의식을 가진 인공두뇌가 탄생할 수 있었고, 바이오-뉴먼이 태어날 수 있었다. 마고의 말대로, 모든 역사는 인과가 직선상에 있는 게 아니라 복잡한 순환구조를 갖고 있는 것일까. 마고가 나에게 한 일이 선한 일인지 악한 일인지 과연 따질 수 있을까. 그 순간도, 순환되는 역사의 중요한 한 부분이겠지. 그렇다면 나는 마고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아니면 화를 내야 하는 걸까?’


재호는 많은 생각을 하다, 결국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췄다. 그리고 재호도 머리 뒤에 손을 가져가서 움푹 들어간 곳을 눌러보았다. 작은 구멍이 생기면서 젤리 같은 것이 치약처럼 짜져서 나왔다. 손에 들고 그걸 보니 정말 헛웃음이 나왔다. 이걸 수천 번의 생 동안 몰랐다고…? 마고는 재호의 나노봇이 든 뇌조직을 가져가더니, 자신의 것과 함께 작은 상자에 넣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문이 열리고 여자 비서가 들어왔다. 비서는 정중하게 둘에게 말했다.


“회의장에 들어가 보십시오. 모두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고와 재호는 옷을 고쳐 입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실에서는 시장과 시의회 사람들이 긴장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나 전부 늙은 남자들이었다. 둘은 테이블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시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미하일, 마가렛. 당신들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죠? 당신들이 인간을 닮은 그럴싸한 로봇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인간들을 교란시키려는 목적으로 왔을지도요.”


재호는 그 말에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시장님. 여기 인간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유전자 검사 키트가 있죠?”


“음…. 아 맞다. 아마도요? 하도 써본 지 오래되어서 잊어버리고 있던 데다 열어보진 않았는데, 매번 로봇들이 가져다주는 의약품에 항상 포함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요.”


“그걸로 저희를 검사해 보세요. 저희가 인간임을 확인하는 건 그것 밖엔 없습니다.”


시장은 키트를 가져오라 지시했다. 의료진은 몇십 년 동안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는 것처럼 허둥대며 키트를 가져왔다. 유전자 검사 키트는 원래 조직을 검출해 컴퓨터 안에 넣고 배양해서 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전자기기가 없이도 할 수 있는 구시대의 간이 검출기기가 있었다. 자세한 DNA의 내역은 나오지 않지만, 그것이 인간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는 빨간 시험선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마고와 재호 둘 다 입안과 코에서 조직을 검출해 세 번이나 시험했지만, 모두 음성으로 나왔다. 인간의 DNA와 일치하는 것이다. 재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손에 장치를 부착했고 그게 DNA에 포함되어 있어서 걱정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정도는 다르다고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회의장은 술렁거렸고, 시장은 가만히 그들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당신들을 믿겠습니다. 인간이니까요. 로봇 편에 서는 인간은 없죠. 미래의 로봇들이 인간을 죽이러 과거로 왔다…. 고대 SF소설에 흔히 나오던 이야기군요. 결국 그런거였고요…. 지금의 인간들도 어렴풋이 두려워하던 일이죠. 그래, 그렇다면 인간의 멸종을 어떻게 막을 겁니까? 우리와 같이 저들과 싸울 겁니까? 당신들도 인간이니 별수 없지 않습니까? 미래에서 왔다면, 당신들이 타고 온 타임머신으로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건가요?”


마고가 비유를 들어 에둘러 말했기에, 인간들은 자신들이 상상하는 수준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마고는 일어서서 대답했다.


“저희는 사람들은 피신시킬 생각이지만…. 타임머신은 없습니다. 시간여행은 우주선 같은 기구를 타고 하는 게 아니라, 의식만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비록 당신들과 같은 인간이지만, 시간여행을 할 수 있도록 훈련과 개조를 받았죠. 저희가 죽으면 다른 차원으로 의식이 들어가, 마음대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처럼 개조를 받는다면, 설사 로봇들에게 죽임을 당하더라도 시간여행을 통해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아무렇게나 죽어도 되는 건 아니고, 목이 잘리면 시간여행을 할 수 없게 되지만요.


지금 여기 계신 분들의 과학 상식으로 전부 다 자세하게 말씀드리는 건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간단히 말씀드리면, 저와 제 오빠… 는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작은 약이 뇌에 들어있습니다. 시간여행은 뇌를 통해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여분의 약도 가지고 왔습니다. 보이시죠? 이 푸딩 같은 것 안에 약이 들어 있습니다. 이 정도의 양이면 한 7명은 저희와 같은 시간 여행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즉, 여기 있는 모든 인간을 살릴 수 있는 건 아니고, 7명을 선발해야 합니다. 그게 저희가 받은 임무입니다.”


그리고 마고는 시장을 쳐다보았다. 재호는 마고가 시장을 쳐다보는 옆모습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마고산에서 떠나기 직전, 회남궁을 바라보던 그 아련한 옆모습. 마고가 이런 선택을 한 것도, 어쩌면 카쉬미르 시장이 유안을 닮아서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연민. 인간과 수많은 삶을 산 마고에겐, 재호도 가지지 못한 연민이 가득할지도 모른다.


회의장은 탄식이 가득했고, 곧 시끄러워졌다. 시장은 시의회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자, 자, 여러분, 일단 진정하세요. 우리는 마지막 살아남은 인류로서,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싸우면 모두 다 죽는 겁니다. 진정하시고, 어떻게 해야 할지 회의를 해 봅시다. 미하일, 마가렛. 두 분은 오늘 늦었으니, 일단 숙소로 가서 쉬세요. 음식을 차려놓으라고 지시해 뒀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내일 같이 더 합시다.”


마고는 나노봇 조직을 챙겼다. 잠시 후, 비서가 들어와 시끄러운 회의실에서 마고와 재호를 데려갔다. 시청에서 나와 어두운 길을 걷다 보니, 재호는 마고의 결정이 내심 걱정되었다.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 동물에게 겁을 준 건 아닐까? 만 명 중에서 7명을 선발하게 되면 어떤 지옥이 펼쳐질까. 혹시 7명 안에 들기 위해 싸우다 자멸하는 건 아닐까? 그게 인간 멸종의 진실은 아닐까?


둘은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엔 장작을 태우는 벽난로가 있었고, 바닥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따듯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나는 숙소였다. 하지만 재호는 아무래도 걱정되어 마고에게 물었다.


“이게…. 잘한 결정이었을까? 그냥 비밀리에 임의로 7명을 선택해야 하지 않았을지…. 내가 본 영화들을 생각하면, 이런 상황에서 인간들은 서로 살기 위해 죽고 죽이게 될 거야.”


그러나 마고는 생각이 조금 다른 듯했다. 일렁이는 벽난로를 보며, 마고는 차분히 말했다.


“그렇게 했을 때, 비밀은 분명히 새어나가게 되어있어. 그럼 정말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거야. 비록 인간들이 만 명 밖에 안 남았지만, 그동안 인간이 이룩한 철학과 시스템의 가치가 모두 모여있는 곳이 바로 여기야. 내가 그들의 행동을 면밀하게 관찰했지만 다른 건 몰라도 폭력성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어. 시장도 시의회 사람들도, 비록 안타깝게도 문화가 가부장제로 되돌아갔지만…. 모두가 그 선에서 인격적으로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느껴져. 또 이런 일은 공개적으로 해야, 누구 하나가 나쁜 짓을 하기 힘들어지지. 영화와 현실은 다른 법이야. 이 방법은 최선은 아니어도, 최악의 선택은 피할 거라고 생각해.”


밤이 깊어지도록 재호와 마고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 다 수천 년의 시간을 살았지만, 살아온 인생이 다른 만큼 생각도 달랐다.


어느덧 새벽이 되어 마고는 침대에서 곧 잠들었지만, 재호는 벽난로 앞의 소파에서 모닥불을 보고 있었다. 일렁이는 불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마고는 나보다 똑똑한 인공두뇌니까, 계산을 제대로 했겠지. 어떤 사람들이 7명에 뽑힐까…. 아마 유안을 닮은 그 시장은 분명 뽑히지 않을까.’


재호는 스스로를 달래며, 앉은 채로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한 시간쯤 뒤 도시에는 전기가 없어 어둠이 짙게 깔렸다. 도시는 조용했다. 불 꺼진 마고와 재호의 숙소 밖에 어떤 그림자가 조용히 나타났다. 그리고 천천히, 냄새도, 색도 없는 어떤 가스가 숙소 안에 퍼졌다. 마고는 이상을 감지하고 눈을 떴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가스는 마고의 의식을 순식간에 잠들게 했다.








다음 날, 재호는 힘겹게 눈을 떴다. 몸이 너무 무거웠고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니, 실제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은 등 뒤로 돌려져 묶여 있었고, 몸은 청테이프로 칭칭 감겨 있었다. 무릎과 발목에도 테이프가 묶여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말하려 했지만 재호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혀를 깨물고 죽지 못하게 한 것 같았다. 손에도 테이프를 칭칭 감아 덮어놔서, 손으로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기’를 만들 수 없다! 재호는 순간 그 지하실에서의 악몽이 떠올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옆에는 마고가 같은 모습으로 묶여 바닥에 눕혀져 있었고, 고통스러운 눈으로 재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곳은 예전에 유치장으로 쓰이던 곳 같았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실수다. 인간들을 너무 인간답게 대했다. 인간들이 어떤 동물인지 수천번의 생을 사는 동안 뼈저리게 겪어서 알고 있었으면서도!


잠시 후, 철문이 열리며 카쉬미르 시장이 들어왔다. 시장은 유안의 얼굴을 한 채로, 쭈그리고 앉아서 재호와 마고에게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미하일, 마가렛. 미래에서 왔다는 당신들 말야.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선택을 하게 할 수가 있어. 인간이라면 그럴 수가 없지. 몸을 그렇게 아프게 묶은 건 미안해. 당신들이 어떻게 시간여행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서 일단 움직이지 못하게 했어. 시간여행 기술로 사라져 버리면 곤란하잖아. 말하는 순간 주문처럼 시간여행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알아? 그래서 그런 것이니 일단 이해해 줘.


마가렛, 당신이 갖고 있던 그 푸딩 같은 물질을 검사해 봤는데 뇌 조각이더군. 당신들의 뇌에도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그 약이 들어있다고 했지. 아마도 그 약은 뇌 조직 속에 있어야 보관이 되는 것인가 봐.


그래서 계산을 해 봤어. 이 도시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시간 여행자가 되려면 약이 얼마나 필요한지. 당신들 두 명의 뇌를 다 쓰면 충분하겠더라고. 난 이 도시의 모든 인간들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야. 당신들은 어차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며?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인류를 위해서 희생해 줘. 나는 인류 전체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어.


당신들이 희생하면…. 우리 인간은 이제 모두 로봇을 넘어서 신이 되어, 영원히 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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