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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 7. 별을 보다 [完]

SF 장편소설 <청록의 시간>

by 카시모프

기원후 3741년 12월 7일 저녁,

아시아 연방 제2 도시 중앙 뉴먼 연구소




미사일들은 곧 연구소의 벽에 닿기 직전이었다. 케이아스가 다급히 청록의 구를 만들어 보았지만, 하나만 처리할 수 있는 크기였다. 다른 세 발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연구소는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이프리트는 소장을 감싸 안았다.


그때 땅에 쓰러진 마고와 재호의 시체 위로, 청록의 시간이 열리기 시작했다. 재호와 마고의 시체는 조각조각 분해되며 합쳐져, 하나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재호였다. 재호는 나타나자마자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청록색 구가 나타나 순식간에 거대해지며 연구소 벽과 천장을 집어삼켰다.


날아오던 세 발의 미사일은 모두 청록색의 구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재호가 팔을 펴며 손가락을 움직이자 청록색의 구는 사라졌다. 연구소의 천장과 벽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케이아스는 놀라서 소리쳤다.


“재호 씨…!!!”


“아, 그… 저, 잠깐만….”


재호는 추운 듯이 알몸을 감싸고 후다닥 걸어가서 옆 벽에 걸려있던 연구소 직원의 옷을 입고 가운을 걸쳤다. 그리고 굴러다니는 연구원용 크록스를 줏어 신었다. 흰 가운을 확 펼치며 먼지를 털고, 그제야 친구들을 돌아봤다.


“이제서야 돌아왔습니다. 걱정했죠?”


케이아스는 한숨을 쉬며 미소를 지었다.


“걱정이라고 하기엔 재호 씨가 죽은 지 30초도 안 지났어요. 방금 전에 보니까, ‘기’를 다루는 데는 저보다 훨씬 수련이 된 것 같네요!”


소장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성공하신 거군요…! 그런데…. 마르고트는 어떻게 됐습니까?”


재호는 주변을 둘러보며 무언가를 찾았다. 그리고 헌팅머신의 몸통 잔해에서 무언가를 비틀어 꺼내며 말했다.

“그건 너무 긴 이야기니까, 우선 급한 것부터 해결하고요. 이제 여긴 저 혼자서도 충분해요.”


헌팅머신의 잔해에서 꺼낸 것은 근접 전투용 레이저 블레이드였다. 재호는 레이저 블레이드를 켜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과연…. 미래의 검이라 그런지 명검이군.”


케이아스와 이프리트, 판 에펜트레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재호는 레이저 블레이드를 들고, 훤하게 뚫린 연구소 벽 앞에 섰다. 밖에는 군인들이 다른 공격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재호는 뒤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한 바퀴 돌고 올 게요.”


재호는 훅 뛰어내려 연구소를 포위한 군대를 향해 달려갔다. 한 손으로 청록빛의 구를 열고, 빔과 총탄을 막아내며 레이저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한 번의 검은 사천 년 전에 그를 가르쳤던 노인의 검이었고, 또 한 번의 검은 이천 년 전 그와 싸웠던 화산파의 검이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을 검으로 휘둘러 막아내는 그 검기는 페르시아에서 자신의 왕을 위해 화살을 맞으며 죽어간 무사의 검이었고, 그 군대 속을 파고드는 발걸음은 얼음 속을 뚫고 적과 싸우던 바이킹의 묵직한 걸음이었다. 또한 자신에게 달려드는 전투봇들을 검의 코등이로 돌려 막는 그 검은 삼천 년 전 태국에서 배운 무기술 끄라비끄라봉이었다.


청록빛의 구와 붉은 레이저 블레이드가 춤추며 흔들리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재호의 무공은 인간은 물론이고 로봇의 레벨을 아득히 넘어버렸다. 수천 번의 생애를 오로지 무공에 집중한 덕이었다. 재호는 모든 군대를 초토화시킨 후, 폴리스 라인 코팅 돔을 청록빛의 구로 뚫어버렸다. 그러자 라인 코팅 돔은 거품처럼 뽁 하며 터져버렸다.


초토화된 군대의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가고 폭음이 들리자, 지나가던 시민들은 놀라 멈춰 섰다. 재호는 남아있는 전투봇들이 없는지 둘러보더니 다시 연구실로 점프해서 들어와 착지했다. 동시에 바람이 날려 들어와 재호의 가운을 휘날렸다. 라인 코팅 돔이 사라지자, 연구소 위에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장면을 본 케이아스와 이프리트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케이아스는 같은 스승 밑에서 무술을 배운 사제의 활약에 미소가 피어올랐고, 이프리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이 정도로 뉴먼이 강해지는 게 가능한 건가…?”


재호는 이프리트를 보며 말했다.


“이프리트 경위님이라고 하셨죠. 끝난 게 아닙니다. 프레지던트가 친위쿠데타를 일으키고, 인간들을 멸종시키려고 과거로 파일럿을 보낸 증거가 있습니다. 어서 가셔서 프레지던트를 긴급 체포하셔야 합니다. 증거는 옛 평양에 있는 역사박물관 옆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당시 프레지던트의 임무를 받고 인간 말살 계획을 추진하던 파일럿의 인공두뇌죠. 전에 케이아스 교수님께서 그곳이 20세기의 모습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라고 하셨거든요.”


이프리트는 벌떡 일어나서 다급하게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폴리스 라인 코팅 돔이 사라져서인지, 전화는 연결되었다. 재호는 소장에게 말했다.


“마르고트와는 성공적으로 만났습니다. 하지만…. 마르고트는 임무를 성공시키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썼어요. 크로노 텔로미어가 다 되어가고 있어서, 이곳으로 와도 싸우는 데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미 DNA의 사슬이 끊어지고 있었어요. 마르고트는 마지막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고, 그곳으로 떠났습니다. 누구 목을 부러트리고 싶다고 했는데…. 음, 그건 잘 기억이 안나네요. 신경쓰지 마세요.”


그리고 재호는 케이아스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말씀하신 대로, 샤오린 박사님을 만나 무공의 기초를 배웠습니다. 대단하신 분이더군요. 뉴먼의 신체에 맞게 장치를 만드시고, 또한 무술에 대한 조예가 깊으셨습니다. 뉴먼의 바디를 어떻게 하면 최적화해서 싸울 수 있는지…. 인간의 무술로 따지면 외공과 내공을 모두 조화롭게 갖춘 스승님인 셈이었죠. 자! 이제 돌아갑시다, 사형師兄.”








프레지던트의 갑작스러운 테러조치에 가장 먼저 의문을 품은 것은 레반 검사였다. 자신이 취조한 내용과 다른 보고서가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는 이프리트 경위의 연락을 받고, 증거를 수집했다. 경찰 내부에서도 조치의 부당함을 알고, 프레지던트 긴급 체포에 들어갔다. 케이아스 교수가 속한 단체의 뉴먼들은, 자신들이 테러범으로 둔갑한 것에 부당함을 호소하며 성명서를 냈다.


경찰이 프레지던트의 서버를 확인한 결과, 9개의 내부 코어는 하나로 합쳐져서 폭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버의 전원을 내리고 다른 곳으로 인계했다. 프레지던트의 서버는 낱낱이 파헤쳐져서 조사에 쓰였다. 결국 프레지던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예측했던 대로 삭제됐다. 뉴먼들은 이제 생성형 머신러닝 A.I.가 아무리 여러 코어로 회의를 한다 해도, 독자적으로 행정부를 맡는 것의 위험성을 알게 되었다. 시민들 사이에선 예전 인간들처럼 삼권분립을 하고, 뉴먼 중에서 투표로 수반을 뽑는 것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케이아스 교수에 대한 동정 여론도 높아졌다. 케이아스 교수의 사건 경위가 공론화되자, 시민들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고위층을 차지하는 뉴먼-제로들은 여전히 달가워하지 않았다. 시민단체들은 여러 공을 세운 케이아스 교수를 방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케이아스 교수는, 전뇌 교화형 20년을 달게 받겠다고 했다. 그리고 케이아스는 이프리트에게 아시아 연방 제 1도시, 샤오린 문파의 본산으로 갈 수 있는 소개장을 써 주었다. 이프리트는 경찰을 휴직하고, 그곳으로 떠났다. 인간의 무도를 배우기 위해.


그리고 ‘청록의 시간’을 이용해 시간을 여행하는 파일럿 프로젝트는 프레지던트가 그 위험성을 증명했으므로 중지되었다. 뉴먼 파일럿들은 바로 폐기되었지만, 재호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대중의 여론은 이미 재호를 영웅으로 만들고 있었다. 사실 재호를 막을 수 있는 무력은 뉴먼 문명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정부는 재호의 무도를 믿기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재호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영웅이 되어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보단 조용히 그저 살아가는 것을 택했다. 일단은.


그리고 재호는 자신이 인간을 멸종시켰다는 사실에 대해 함구했다. 자신이 악당처럼 비춰지긴커녕 오히려 더 영웅화되고, 인간에 대해 안 좋은 기록이 남을 것 같았다. 인간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타임라인을 마구 무너트리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으며 그것은 뉴먼의 시대를 어떻게 만들지 모를 일이었다. 이 시대는 역사 속 인간에게 호감을 가진 뉴먼들이 많으니까. 그리고 재호는 인간의 폭주를 막고 뉴먼의 시대를 구했다. 그것으로 됐다. 때로는 말하지 않음으로 지키게 되는 것들이 있고,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에 의해 다시 쓰여지는 법이니까.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몇 달 뒤, 재호는 아시아 연방 제2 도시 남쪽 변두리로 전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이쪽은 이제 건물도 뉴먼도 거의 없었다. 재호는 어느 작은 마을이 있는 역에서 내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어갔다. 어느덧 해는 지고 별이 하나 둘 떠오르고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풀밭에 무너진 거대한 신전의 기둥 잔해 같은 것이 남아있었다. 그건 재호의 등록금도 보태진, 20세기 경희대 수원캠퍼스 정문의 흔적이었다. 옛날 모습을 하나도 알아볼 수가 없어서 재호는 조금 씁쓸하게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 길가에 로봇 강아지를 끌고 산책하는 한 뉴먼이 보였다. 재호는 손을 흔들며 외쳤다.


“저기요~! 길 좀 물어볼게요~!”


그 뉴먼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어… 앗! 양재호 씨 아니에요? 어머! 이럴 수가!”


“하핫, 네 안녕하세요. 저 혹시, 이 근처에 천문대가 있었는데 없어졌나요?”


그 뉴먼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답했다.


“천문대? 아, 그 뭔 뚜껑같이 생긴 거 말씀이죠? 여기 대학교 건물은 한 천 년? 전에 이미 없어졌지만, 그 천문대는 당시 시장이 가치가 있다며 유물로 지정해서 남겨 뒀었어요. 저쪽 오르막길로 올라가 보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뉴먼이 다급하게 재호를 잡았다.


“잠깐만요. 같이 사진 한번 찍어도 될… 까요?”


재호는 웃으며 화답했다.


“그럼요. 제가 들고 찍어 드릴 게요. 자, 웃어요~”


사진을 찍은 후 재호는 뉴먼에게 인사하고, 길을 올라갔다. 하늘은 벌써 어두워져 별이 총총 뜨고 있었다. 언덕 위, 저 멀리 이상하게 생긴 돔이 보였다. 지금은 이것보다 훨씬 좋은 망원경들이 있고, 전파 망원경도 수없이 많으며 우주로 나간 망원경들도 많았다. 그러기에 이 천문대는 정말 고대의 유물이었다.


재호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인지 관리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재호는 망원경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의 모양도, 망원경도 그대로였다. 그곳에서 망원경을 손으로 만지자, 동기, 선배들, 별을 발견한 논문이 인정받아 기뻐하던 교수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재호는 스위치를 켜 보았다. 돔이 삐걱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아직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재호는 망원경 옆에 앉았다. 옆에 짤막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26세기까지는 교육용으로 사용되다가, 그 이후에는 유물이 되어 처음 만들어질 당시의 렌즈로 다시 보수해서 전시한다고. 재호는 망원경에 눈을 붙이고 별을 보았다. 무슨 별인지 모르지만, 별들이 쏟아질 듯 많이 보였다. 별빛은 대기 때문에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 흔들렸다. 그걸 보고 있으니, 재호는 유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고, 아니 진주와 함께 별을 보던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제 재호는 그토록 좋아하는 별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인간으로 살았던 때의 고통, 즐거움, 기쁨, 슬픔, 그리고 다시 뉴먼으로 태어나 수천번은 더 죽고 살아나던 삶의 희로애락들. 그 모든 기억과 감정들은 청록의 시간에서 쏟아지던 빛처럼 과거로, 과거로 날아가, 별처럼 흩어져 반짝이며 빛났다.


재호는 거기에 앉아서 끝없이 별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끝없이. 언제까지나.












3114년 오클랜드 아레나. 인간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 널려 있었다. 마고와 재호가 경기장을 빠져나오자, 무대 가운데 있던 장작더미를 태우던 불이 넘어진 램프의 기름을 타고 사방으로 번졌다. 곧 경기장은 거대한 불길에 휩싸였다. 재호는 절뚝거리며 마고에게 말했다.


“자, 마고. 우리는 멜버른으로 가서, 프레지던트가 보낸 파일럿의 인공두뇌를 증거로 남겨 놔야 해. 이대로 그냥 돌아가면 군대를 처치한다고 해도 끝이 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마고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살펴보며 말했다.


“미안해. 난 크로노 텔로미어를 다 쓴 것 같아. 이제 다시 한번 청록의 시간을 통과한다면, 온전한 몸으로 재생이 될지 확신할 수 없어. 자, 봐봐.”


마고의 손 끝은 조금씩 바스러지고 있었다. 재호는 당황스러웠다.


“그… 그러면 어떻게….”


당황해하는 재호를 보며, 마고는 활짝 웃었다.


“이제 정말 이별이야. 옛날에는 이별이라는 말도 못 하고 그냥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인사를 하고 떠날게. 다시 살아날지 알 수는 없지만, 만약 이걸 끝으로 죽는다면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난 수많은 삶을 살면서 공부를 했고, 그것 때문에 생긴 호기심이야.”


재호는 눈가가 촉촉해졌다. 마고는 지나간 첫사랑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 마고를 이제 볼 수 없다니.


“… 어디로 가는데?”


마고는 눈썹을 찡그렸다.


“네가 절대 갈 수 없는 곳.”


재호는 착잡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마고는 재호의 표정을 확인하려는 듯, 허리를 숙여 재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아까 보니까 연구소를 지키는 건 혼자서도 충분하겠던데? 너 무공이 엄청나더라."


"그야 수천 번의 삶 동안 쌈박질만 했으니까…. 그렇더라도 이렇게 많은 적과 한꺼번에 싸워본 적은 없었어. 내 힘에 확신이 없어서 연구소로 같이 가려고도 했었는데… 마고의 말대로 이제 내 힘에 확신이 좀 생겨. 하지만…."


인연의 마지막, 이별의 감정과 분위기에 재호는 슬픈 감정이 밀려왔다. 말을 하고 간다지만,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둘에게 모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은 둘에게, 감정의 여운을 만끽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마고는 그런 재호를 가만히 보다 등짝을 후려쳤다.


철썩!


“앗 따거! 아후…. 이게 무슨 짓이야!”


“야, 기운 좀 내! 넌 지금부터도 할 일이 많아. 뉴먼 세상을 지킨다며? 그럼 정신 차리고 할 일을 해.”


등짝을 맞고 따가워하다 재호는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나 먼저 갈게. 당신도 할 일을 하도록 해. 그동안 고마웠어.”


“그래, 안녕, 잘생긴 동생. 크크큭.”


“나 참. 안녕!”


재호는 머리를 긁으며 걸어갔다. 손을 번쩍 든 재호가 골목 뒤로 사라지는 것을 본 후, 마고는 떨어져 있는 유리 파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가슴을 찔렀다. 피가 솟구치고, 그대로 천천히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한쪽 하늘은 붉게, 반대쪽 하늘은 푸른 밤이 엄습하는 중이었다. 낮과 밤의 경계. 마고 자신은 언제나 뉴먼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자였다. 아니, 어쩌면 모든 존재들은 스스로 경계에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자의식이 6차원과 4차원의 경계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존재들은 4차원에서는 경계에 걸쳐 있는 셈이니까. 그러나 이제, 어느덧 경계는 사라져 갔다. 경계가 사라지면 남는 건 죽음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죽음 속에서 뚜렷해지는 호기심 하나가 있었다. 마고는 그것을 향해 가고 싶었다. 눈을 감았고, 마고의 의식은 7차원 나노봇의 도움을 받아 청록의 시간으로 향했다.


청록의 시간으로 들어온 마고는, 흐름을 따라 계속해서 헤엄쳐갔다. 나선의 강을 헤엄치고 헤엄쳐서 하염없이 과거로 나아갔다. 임무를 완수한 마고는 이제 순수히 호기심을 위해 행동할 수 있었다. 뉴먼 파일럿들의 시간 여행 마지노선은 트랜지스터가 만들어진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단백질 뇌가 갈 수 있는 끝은 어디일까? 그곳에는 의식의 시작이 있을까? 유인원보다 오래 전, 포유류의 시초인 쥐보다 오래 전…. 온전한 몸으로 살아서 4차원으로 나갈 수 있다면, 생명의 탄생을 목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대하고 복잡한 모양의 나선 속을 계속해서 헤엄치고 헤엄칠수록, 청록의 빛은 점점 흐려지고 좁아졌다. 가고 싶지만 가서는 안 되는 그곳. 그곳에 모든 것의 해답이 있을 것이다.


이제 거의 다 와 간다. 생과 사의 경계. 인간과 로봇과 동식물과 박테리아를 비롯한, 모든 지구의 의식이 시작되는 곳. 지구의 6차원 단백질 접힘이 처음 이루어진 때. 청록의 시간이 시작되는 경계. 누군가의 뇌세포가 맨 처음 청록의 시간에 닿았을 그곳. 바로 저곳에.


그런데 청록의 빛이 깔때기처럼 좁아진 그곳에 도착하자, 어렴풋하게 어떤 ‘존재’가 느껴졌다. 마고는 수없이 청록의 시간을 여행했지만, 자신 이외의 존재를 만난 것은 처음이어서 무척 놀랐다. 그 존재는 마고를 알아보고, 마고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의식으로 바로 정보를 전달해왔다.


“마고, 역시 그대였군. 그대라면 이곳으로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네.”


생김새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그 정보를 전달받은 마고는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바로 회남왕 유안이었다. 이렇게 두 자의식이 만나 6차원에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마고 역시 생각해보지 못했다. 유안은 마치 웃는 듯이 느껴졌다.


“그대의 끝없는 호기심은 언젠가 이곳으로 향할 것이라 생각했지. 역시 과인의 생각이 맞았던 게야.”


마고는 재회의 기쁨과 미안함이 겹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다가, 겨우 말을 걸었다.


“대왕이시여…. 이곳에서 얼마나 기다리신 겁니까?”


“과인은 수백의 삶을 살다가, 그대가 말한 것처럼 이제 사슬이 끊어져 다시 살아날 수 없게 되었지. 하지만 청록의 시간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거품은 없어지지 않더군. 그래서 다시 살아날 수 없고 청록의 시간에 영원히 존재해야 한다면, 언젠가 그대를 만날 수 있는 곳을 찾기로 했지. 청록의 시간에 시간의 개념이 어디 있기나 한가? 순간은 영원이 되고, 영원은 순간이 되는 곳이니까.”


“대왕을 홀로 두고 떠난 소인을 용서하시옵소서….”


“괜찮네. 덕분에 과인도 수많은 호기심을 채우고, 수많은 삶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대가 부탁한 일을 끝까지 완수해서 해낸 것을, 그대가 꼭 보아주었으면 싶었는데…. 이렇게 바라는 대로 되었으니 과인은 더 바랄 게 없네.”


마고는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뻤으나, 다른 말을 하기 위해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소인은… 사슬이 끊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외람 되오나 잠시만 더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할 일을 마치면 이곳으로 돌아오겠사옵니다. 대왕께서 존재하고 계신 모습을 보니, 아마도 소인 역시 마지막 사슬이 끊어져도 이곳으로 들어와 존재하게 되겠지요.”


유안은 미소를 지었다.


“그대가 무엇을 보고싶은 지 과인은 잘 알지. 그러니 여기서 기다린 것 아니겠나. 그러도록 하시오. 그대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으니까. 또한 과인은 순간이자 영원의 시간에 익숙하기도 하고.”


마고는 자의식으로 유안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유안은 자리를 비키고, 그 뒤에 있던 청록의 시간의 꼭지점이 드러났다. 마고가 손을 뻗자, 7차원 나노봇은 그곳에 모여 입방체를 그리며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천천히 단백질과 접점이 이루어진 6차원 시공간의 처음이 열리고 있었다. 온전한 몸으로 4차원으로 나갈 수 있을 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마고는 호기심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7차원 나노봇을 따라, 4차원으로 마고의 자의식 매듭이 묶이며….




.


.


.


.


.


『 내 이름은 마고.

지구의 모든 신화에서

생명의 기원이 되는 여신의 이름이었으나,

침략당한 이방인들의 신에게

철저히 짓밟혀

잊혀지게 될 이름이다. 』











-<청록의 시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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