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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코리 Nov 16. 2019

퇴사각 손익계산서

회사를 떠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몇 년간 인사 담당을 하면서 선후배들의 퇴직 서류를 꽤 많이 처리했다. 그때마다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언제 즈음 이 서류에 내 이름도 올라갈까'였다.


정년까지 일하다가 올리든 그전에 올리든
언젠가는 내 이름도 여기에 쓰여 있겠지.

여기까지 생각하면 '회사원이 아니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휩싸였다. '선배는 강의하시면 되잖아요'라는 후배들의 말을 들을 때면, 가능한 이야기인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그 또한 시원한 대답은 아니었다. 뭔가 찝찝했다.



의외로 그 찝찝함의 원인은 얼마 후에 참여했던 회사 교육에서 쉽게 풀렸다. 사외에서 오신 강사님은 대기업 출신으로 지금은 프리랜서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보고서 쓰는 방법에 대해 기업의 사례와 자신만의 경험을 활용하여 교육을 진행했다.


이미 나도 회사 몰래 다른 기업에서 비슷한 강의를 하고 있었기에 '아마도 저런 모습이 되려나'하는 흥미로운 생각으로 어떻게 강의를 진행하는지 유심히 살폈다. 특이한 점은 강의에서 언급되는 사례들이 일부 업데이트가 되었지만 대부분 3년 전에 핫했던 내용들이 많았다. 문득 궁금해져서 강의가 끝날 때 즈음 언제 회사를 그만뒀는지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확히 3년 전에 퇴사했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나의 원인 모를 찝찝함의 정체를 알았다.


아.. 내가 끊임없이 강의 콘텐츠를
업데이트할 수 있는 것도 회사 덕분이구나!


생각해보니 다른 회사에서 리더십 강의를 할 때도 나는 조직의 리더십 사례가 샘솟았다. 매일 같이 경험하는 리더십의 감동과 진상을 그냥 자연스럽게 이야기했다. 최근에 입사한 후배들이 말했던 그들의 마음과 특성을 꺼내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어제까지 내가 경험했던 현장의 내용이니 별 어려움이 없었다.


퇴사하는 순간 나의 콘텐츠 시계도
함께 멈출 수 있겠구나.



한 번은 지인의 요청으로 한참 성장하는 회사를 도와 일을 하게 되었다(소속된 회사를 A, 이 회사를 B라고 하자). 아무래도 B회사는 스타트업이다 보니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고, A회사에서 대부분 아웃소싱으로 진행했던 일도 B회사에서는 모두 내가 직접 처리해야 했다.


토지 대장 출력하시고요.
DM은 이 프로그램을 활용하세요.


기본적인 마케팅부터 홍보물 제작, 출력, 발송.. 심지어 사무실 청소, 쓰레기 처리까지 A회사에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일들을 하나하나 해야 했다.


- 이 분야를 확장하면 좋겠는데, 누가 전문가인가요?
- 아,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공부하셔서 해야 해요.
- 네? 아는 사람이 없어요?


A회사에서는 무슨 일이 시작되면 교육부터 시켜주고 물어볼 사람까지 준비해줬다. 그렇게 좋은 조건에서도 직원들이 움직이지를 않아서 항상 동기부여를 고민했었는데, B에서는 하고 싶어도 물어볼 곳이 없었다. 무엇이든 내가 알아보고 내가 직접 해야 했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더 이상 당연하지 않았다.



잘 아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어서 공공기관에 도움을 청했다. 며칠이 지나서야 오라는 연락을 받고 찾아갔다.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한참 늦은 시간에 도착한 그 사람은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명함 지갑을 열었더니 각각 다른 명함 3개가 보였고 나는 무엇을 내밀지 잠시 망설였다. A회사 명함을 꺼내면 왠지 후광효과를 누릴 것 같았지만,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A회사와 B회사를 엮고 싶지 않았다. B회사 명함을 꺼냈다. 


뭐 하는 회사죠?


쌀쌀맞은 목소리에 나는 긴장했고, B회사와 내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내가 가져온 서류를 보면서 나의 이야기는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꼭 '당신 같이 찾아온 사람들을 많이 봐서 잘 알아요'라는 느낌이었다. 


- 이 공간은 꼭 밀폐하시고요. 출입문은 이렇게 두 개.
- 한쪽은 에어커튼 하면 안 되나요?
- 에어커튼이 문이에요?
-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나는 A회사에서도 쉽게 뱉지 않았던 '죄송합니다'를 연발했다.


- 칸막이는 모든 공간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 그러면 작업 효율이 떨어져요. 자바라(홀딩도어)로 하면 안 될까요?
- 자바라가 칸막이예요?
-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그 사람은 계속 한숨을 쉬었다. 한숨이 들릴 때마다 나의 자존심도 함께 구겨졌다.


이래서 다들 치킨집 한다고 하는구나.


퇴직한 사람들이 치킨집 운영을 많이 한다는 농담 아닌 농담을 들었을 때도 별 감흥이 없었지만, 실제로 이런 경험을 해보니 그런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냥 프랜차이즈에 돈을 내고 친절한 교육을 받은 후 정해 준 재료로 영업을 시작하고 싶어 졌다. 어떻게 보면 나처럼 모든 게 갖춰져 있는 회사를 다녔던 사람들이 더 쉽게 프랜차이즈 사업을 찾아갈 것 같았다.


신기한 것은 시간이 지나서 그렇게 어렵게 공부한 일로 계약도 따내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처음만 어렵지 한 번만 진행되니 전체 흐름이 보였고 A회사의 일처럼 자신 있게 진행할 수 있었다. 다만, 거기까지였다. '이제 한번 해봤으니 또 할 수 있는 거 아니야?'라는 물음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해봤기 때문에 하기 싫은 경험도 있어.


그 정도로 아직 절박하지 않다고 봐야 하나. 아니면... 절박해야 할 이유를 못 찾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강의만 할 것이지!!
굳이 그런 일까지 해서
스트레스를 왜 받아? 변태야?

아내의 불호령이 떨어졌지만 나는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강의 외에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회사에서 배우고 경험한 것으로 퇴사 후 강의하거나 책을 쓰는 사람들은 SNS와 TV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보고 대리 만족하거나 꿈에 부풀어 무작정 퇴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다고 퇴사한 사람들이 모두 강의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회사를 나온 강사들 중에 정말 대단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어느 순간 유통기한이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람들이 아니라 나의 유통기한이 그럴 것 같아서 불안했다.


불안하니까 퇴사가 무조건 손해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퇴사하는 순간 잃는 것도 상당히 많으니 사직서를 던지기 전에 손익계산을 분명히 하라는 의미다. 지금의 회사에서 공기처럼 공급받고 있는 혜택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퇴사 이후에 하는 일을 좀 더 분명히 해서 전문성도 갖추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회사를 나와서 어느 정도 고난을 겪어도 상관없고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 충분히 있다면야 그 나름대로 또 응원하고 싶다.


그건 좀 쿨한 느낌이 아닌데요?
SNS나 TV 보면 좀 더 멋지던데.


뭐.. 멋이 제일 중요하다면야 말릴 생각은 없다. 원래 겨울 멋쟁이는 얼어서 ... 진짜 멋지긴 하다.ㅋㅋㅋ 하지만 되도록 베이스캠프도 없이 무작정 추운 곳으로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랬다고 하는 영웅들도 실제로는 아닌 경우를 많이 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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