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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코리 Sep 09. 2019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회사라는 동물원의 끝도 없는 바나나 경쟁

매년 연말이 되면 올해 성과가 어땠는지 평가를 받는다. 이 성과는 승진은 물론이고 다음 해의 연봉 상승과 연결되기에 일 년 내내 평가자인 팀장과 사이가 안 좋던 사람들도 갑자기 친한 척을 한다. 그래서 가을이 되고 날씨가 추워지면 안 하던 야근을 하고 팀장과 시간을 보내려는 사람이 많아진다. 실제로 이 전술을 시연해 본 나로서도 이 방법이 상당히 효과적임을 증명할 수 있는데, 회사생활 초반에는 이것을 모르고 고생을 많이 했다.


이 정도면 올해 평가는 작년보다 괜찮겠는걸.


내심 기대를 한 적이 있었다. 특히 어느 정도 회사에 적응이 된 4년 차부터는 회사 매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영업 실적이 좋았고, 우수사원으로 선정되어 해외여행도 몇 차례 다녀왔다. 하지만 그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평가는 항상 '보통'이었다. 당시 5년 차까지 지급하던 루키 보너스를 한 번도 받지 못했다. 신인상을 받을 기회가 5년이나 있었는데 받지 못한 선수가 되었다. 평가를 잘 같은 동기들의 SNS를 보면 마음이 불편하고 왠지 내가 부족한 사람인 것 같았다.



당연히 승진도 동기들보다 늦어지겠지.


현재에 대한 불만족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동시에 엄습했다. 그게 뭐라고 그 사람이 주는 '보통', '잘함'이 나의 행복도를 좌우했다. 그것이 내 가치와 수준을 의미하는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운이 좋아 동기들보다 승진이 빠를 때는 나름의 대사가 또 준비되어 있었다.


코리는 아직 팀장 하기에는 너무 젊잖아.
빠르니까 이번에는 김선배에게 양보하자.


기념품 가게에서 듣는 세일즈 스크립트처럼 회사에서 만들어준 것 같은 상무의 다양한 드립이 시연되었다. 그리고 일부 예외는 있지만 대부분의 회사원은 그 나이에 맞는 적당한 직급으로 평준화되는 작업에 농락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거기서 억울함을 표시하여 겸손함의 미덕을 파괴하는 이기적인 직원이 되거나 욕심이 많은 팀원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두려웠다. 그래서 소위 자기 계발서에서 많이 언급되는 현명하게(?) 말하는 기술로 대응하며,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깨달음'을 장착한 인재상에 맞는 직원처럼 연기했다. 수년의 회사생활로 표정 연기가 자연스러워지고 말 센스까지 더해지면서 나의 차례는 운이 좋게 매번 늦지 않게 찾아왔다. 역시 자기 계발 책은 동물원 생존에 도움이 되니 일단 많이 읽고 볼 일이었다.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도 부러워했다던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 그는 자유를 보장하는 이성적인 삶을 강조했다. 유명한 일화인 알렉산더와의 대화를 보면, 그는 가지고 있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말해 보라.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라.
그대는 짐이 두렵지 않은가?
도대체 당신이 누구인가? 선한 자인가? 악한 자인가?
물론 선한 자다.
그렇다면 누가 선한 자를 두려워하겠는가?


휴직을 하고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에는 술통 속에 살던 디오게네스처럼 카페에 가서 하루 내내 음악을 듣고 넷플릭스 미드와 만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일어나자마자 씻지도 않고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나가 앉아 있었다. 아내가 제발 옷은 갈아입고 나가라며 말렸다.


카페 직원들이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해하겠다.
어제와 같은 옷에 입고 슬리퍼 끌며 새벽에 나타나는 남자.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리며 하루를 보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왜 이렇게 여유롭게 살면 안 된다고 교육받았을까. 하루만 연습을 쉬어도 내가 알고 관중이 안다며 계속 달리는 삶이 가치 있는 것이라 훈련받은 이유는 뭘까. 그리고 이런 가치관을 고스란히 아이들에게도 전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섬뜻했다. 세상은 이렇게 놀다 오라고 보내준 프로모션이었는데 휴가 와서 회사 전화받고 싸우고 경쟁하며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는 것이 아닌지 불안해졌다.


불쌍한 칼리스테네스, 알렉산더가 원하면 언제든지 달려가 식사를 해야 한다니.


디오게네스가 한때 알렉산더의 에이스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를 두고 한 말이다. 문득 사장, 상무가 언제 나를 찾을지 몰라서 핸드폰을 꼭 붙들고 다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점심시간이 돼도 그가 움직이지 않으면 나도 밥을 먹지 않았다. 그게 불쌍한 일인지 모르고,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인 줄 알았다. 한가로운 시간은 뭔가 이룬 사람들만 즐길 수 있는 노년의 대가라고 생각했다.



코리, 언제 돌아올 거야. 이번에 좋은 자리 생겼어.
얼른 복직해. 자리 없어지면 기회 또 놓치는 거야.


디오게네스처럼 '지금 커피를 음미하며 음악을 감상하는 중이니 이따가 전화 주실래요' 하고 싶었지만, 찾아온 알렉산더 대왕을 버선발로 달려 나가 환영하는 것처럼 자기 계발 신공을 펼쳤다. '어떻게 쉬는 사람에게 잊지 않고 이렇게 연락을 주셨냐며 불러만 주시면 각골난망(은혜를 뼈에 새겨 잊지 않겠다) 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씁쓸하지만 복직하고 1년 뒤가 되면 아마 그도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할 것 같았다.


이 바나나(잘함) 너 줄까? 다른 사람 줄까?


그를 비난하거나 원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도 후배들에게 똑같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두렵다. 그도 또 다른 회의실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고 있을 것이다. 책에서 보면 직원들이 출근할 때 가슴이 셀레고 회사에서는 춤을 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 현실은 이런 바나나 경쟁 구조다. 돌아가서 내년 평가 시즌이 되었을 때 디오게네스처럼 '그 딴 거 필요 없으니 많이 드시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훈련된 파블로프의 개처럼 바나나만 보면 입안에 침이 흥건해지는 내게 그 정도의 용기가 있을까. 아직 확신이 없다.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복직을 조금 더 미뤄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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