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바르셀로나 일지 (1)

2023. 08. 07부터 2023. 08. 13까지

by 양양

<2023. 08. 07>

(1)

기나긴 밤이 지나고 다시 기나긴 낮이 찾아왔다.

나라 이동을 하는 날은 언제나 피곤하다.

물론 이것도 마지막이기는 하지만..

플릭스 버스가 밀라노 때랑 달라서

1층에다가 그리 쾌적하지도 않았고,

원래 예약한 좌석에는 앉지도 못했다.

내 5000원.

그렇게 잠도 잤다 깼다 하면서 스페인에 도착!

그런데 숙소를 보고 또 다시 절망에 빠졌다.

물론 저렴하게 숙박을 잡았으니

초호화 호텔을 바란 건 아니었다.

근데 이건.. 정말 그야말로 셋방이잖아!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창고같은 방이었다.

그동안 하루도 편히 지내본 적이 없는데

여기서 2주를 지내야 한다는 사실에 막막해졌다.

아마 에너지가 거의 바닥이 났나보다.

어딜 가야할지 계획하는 것도 귀찮고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또 아득하다.

오늘 숙소가서 좀 자고 내일부터 본격적인

스페인을 둘러보면 또 괜찮아지겠지?

남은 2주 후회없이 즐기고 싶다.

내가 두 달 반을 해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 준비할 때까지만 해도 기차, 숙소 에약에

스트레스 받고 멀게만 느껴졌는데,

눈 앞에 놓인 관문 하나하나를 넘다보니

마지막 나라까지 왔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처음이랑 비교하면 많이 강인해지기도 했지.

택시도 안타고

지하철로 열심히 왔다 갔다 할 수도 있게되었으니.

화폐단위도 익숙해졌고!

그래도 새로운 나라에 또 적응하는 건

참 어려운 문제다.

새로운 용기가 필요하니 말이다.



(2)

진짜 너무 집에 가고싶어. 힘들어.

이 숙소에서 어떻게 2주를 지내?

방은 비좁고, 창고같고 덥고.

선풍기도 낡아서 끽끽 소리나고.

헤어드라이기는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아서

선풍기로 머리를 말려야 하고.

전기 콘센트도 하나밖에 없어서

보조배터리, 에어팟, 휴대폰 다 번갈아가면서

충전해야된다.

그동안 숙소 불편한 것들을 다 참아왔는데

고작 2주가 왜 이렇게

버티기 힘들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피부가 다 뒤집어졌다. 성한 곳이 없다.

얼굴에는 울긋불긋 여드름이 다 올라왔고

머릿결은 부슬부슬 상해버렸다.

음식을 조금만 먹어도 붓고 소화가 안돼 가스가 찬다. 내가 생각한 유럽여행은 이게 아닌데.. 아닌가?

이게 맞는 걸까?

그때는 이런 종류의 고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하고 겪으니 미칠 노릇이다.

나는 왜 다른 사람처럼 무난한 여행을 할 수 없는 걸까? 스트레스 받는다.

사실 이제 여행이고 뭐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내 방, 내 침대, 내 욕실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싶다.

제발.. 제발. 너무 외롭고 힘들다.

처음 런던에서 느꼈던 감정과 비슷하다.

엄마아빠 친구들도 다 자는 시간이고,

나 혼자 남은 느낌.

방은 쪄죽을듯이 덥고 휴대폰 배터리는 없고

몸은 엉망이고. 이제는 너무 지친다. 버틸 힘이 없다.

근데 집에 갈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괴로워하며 버티는 것밖에 없는 거다.


<2023. 08. 08>

(1)

본격적인 바르셀로나 여행이 시작되었다.

일단 지금은 아침을 먹기 위해 맥도날드에 와있다.

이따 11시에

사그리다파밀리아 성당 내부 예약을 해두었다.

지나가며 외관만 봤을 때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내부는 또 얼마나 대단할지 기대가 된다.

앞으로는 정말 2주도 채 남지 않았다.

더 많이 보고, 놀고 즐기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다.

여러 문제들이나 불편함은 잠시 제쳐두고

가우디의 여러 작품들과

바르셀로나의 분위기를 느껴보자!

역시 바르셀로나는 사람이 참 많구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수 있으니

마지막까지 항상 조심해야겠다.


(2)

나는 지금 가우디의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 안이다. 오디오로 설명까지 들어가며 둘러보았는데,

가우디가 정말 엄청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건축물에 바친다는 건 어떨까? 그건 대체 어떤 마음일까?

종교가 없다보니 여행 중 마주하는 성당을

'건축물'로만 바라보았을 뿐

종교적 의미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그리다파밀리아 성당에 와보니

웅장한 건축도 건축이지만,

그 건축물 속의 이야기들과 의미들을

다 알게 되어서 좋았다.

다시 생각해도 인간이

이런 건축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할 따름이다. 정확한 계산과 의미를 함축시키고

그에 맞는 자재를 고르고, 실제로 건축하기까지..

아직도 완공이 되지 않았으니

이 자체로 진행형인 것이다.

내가 이 진행 과정 중 작은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을 저장해둘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진으로는 차마 다 담기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실제로 마주한 것도 없고 실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따지고보면 훨씬 높은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신이 자신의 인생을 안내해준다고 믿는 걸까?

매주 예배를 드리고, 찬송가를 만들어부르고,

엄청난 건축물을 만들고.

하지만 신이 실제로 존재하든 아니든

신의 존재가 누군가의 마음을 안심시켜 줄 수 있고

위안이 된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스스로가 가고 있다고 믿으며,

교회나 성당에서 마음의 휴식을 얻게 된다면

그걸로 제 역할을 다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아주 바쁘게 걸어다닌 바르셀로나 첫 날.

엄청난 건축물들을 봤다.

사그리다파밀리아, 산트파우 병원,

까사비센스, 까사밀라.

스페인은 낭만 가득 잔잔한 도시는 아니어서

기가 많이 빨린 것 같지만 그래도 갈 곳이 많고

맛있는 음식들, 개성 가득한 패션들이 가득해서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힘든 일, 스트레스 받는 일들은 잠시 다 제쳐두고

최대한 많은 것들을 재미지게 누리는 게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이다.

아마 나중에 돌아보면

지금만큼 그립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때도 없겠지.

내 인생에 앞으로 혼자 유럽을

두 달 넘게 언제 와보겠어.

그렇게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참 소중하다.

물론 많이 지쳤겠지만, 끝까지 잘 챙겨서

다치지 않고 사고 없이 놀자!


<2023. 08. 09>

(1)

잠을 또 또 설쳤다.

모기에 잔뜩 물렸고 전기코드는 하나밖에 없어서

에어팟 충전도 못했다.

더워도 선풍기를 돌릴 수가 없다.

그리고 머리를 감아도 감은 느낌이 안든다(?)

드라이기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서

선풍기 바람으로 머리를 말려야한다.

안그래도 머릿결이 많이 상했는데

아마 한국 돌아가면 머리를 잘라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피부!

신경 안쓰고 스트렉스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거울 보기가 싫다.

나도 화려하게 꾸미고 유럽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너무 속상하다.

애초에 나는 그게 불가능한 인간이었을지도 모르지.

이젠 포기했다.

그리고 또, 얼른 내 진짜 휴대폰을 좀 되찾고 싶다.

배터리 신경쓰느라 그만 스트레스 받고 싶어.

노래도 마음껏 듣고싶고, 지도도 봐야하고,

사진도 찍어야하는데

배터리가 너무나도 빨리 닳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냐면,

꿈에서조차 엄마와 유럽여행을 갔다.

둘이 한참 헤매다가 숙소를 찾아서 들어갔는데

세상에나.. 사람들이 바글바글한거다.

심지어 테라스에는 몇십명이 이불 깔고 누워있었다.

너무 당황해서 우리 숙소라고 옆 외국인 여자에게

물어보니 주인 없어서 그냥 아무나 들어와서 잔다는

황당한 소리를 해댔다.

그리곤 꿈에서 깼다... 깨고나니 팔을 잔뜩 올리고 자서 온통 쥐가 나있었고

그 이후로는 자는 게 자는 게 아니었다.

한 시간마다 깨고 온 몸이 찌뿌둥하다.

이미 내 여행 에너지는 바닥이 났다.

마지막 2주를 위해 어떻게든 쥐어짜내는 중인거다.

회복은 한국에 돌아가서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조금만 더 기운을 내자.

오늘 빠에야도 먹어보고 몬주익도 제대로 둘러보자!


(2)

드디어 빠에야를 먹으러 왔다.

최소 2인분이라는데 나눠먹을 사람이 없어서 걱정.

그래도 스페인에 도착한 이후로

처음 맛보는 스페인 음식이라 기대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광지 음식점 느낌이 아니라

현지 맛집 같아서 더더욱 기대가 된다.

밥 든든히 먹고 몬주익을 가봐야지.

가서 천천히 둘러보고 책도 읽고 사진도 찍고

내려와서 분수를 봐야겠다.

2주 뒤면 이렇게 일상이 되어버린 여행도

그리워지는 때가 올까?

혼자 라디오를 듣고 일기를 쓰며, 밥을 먹고, 걷고,

손빨래를 하고ㅋㅋ.

아마 편안한 것들이 많으니

이렇게 글을 쓰지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이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얼른 집에 가고싶은 마음과

여행을 계속하고픈 마음이 공존해..

중요한 건 한국에 돌아간 이후다.

유럽에 오기 전 느꼈던 권태감을 마주해서는 안된다. 활력을 가지고 열심히 나아가야 한다. 우울해지지말기! 복학하기 전까지

내 꿈에 더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 일상에서의 즐거움들도 찾아야 하고.


(3)

몬주익 성을 보고왔다.

입장료가 매우 괘씸하기는 했지만, 풍경은 장관이었다. 처음 바다뷰를 마주한 순간 또 울컥했다.

바르셀로나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특이한 경험을 하나 했다.

어떤 외국인 남성분이 여자친구와 자신의 영상을 찍어달라고 요청하시길래, 흔쾌히 찍어드렸는데

갑자기 프로포즈를 하시는 게 아닌가!

여자친구에게 반지까지 끼워주자

두 사람은 결국 눈물이 터졌다.

두 사람 인생 중 중요한 순간에 내가 함께하게 되다니. 너무 사랑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조금 머쓱했다.

내가 바르셀로나까지 와서

커플 사이에 끼어야한다니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런 경험을 살면서 또 언제 해보겠어!

그 두 분이 앞으로 행복하고 달달하게

평생 행복하게 사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다시 걸어 내려오는데,

매우 덥고 덥고 또 더워서 잔뜩 후회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안나고 기운은 없고 다리도 아팠다극한까지 가서야 스타벅스로 피신와서

딸기 프라푸치노로 나를 달랬다.

날이 더워서 더 금방 지치는 것 같다.

계속 갈증나고 속도 쓰리고...

으아 우리집 거실 맨 바닥에 에어컨 틀고 누워서

뒹굴거리다가 수박 먹으며 넷플릭스 보고싶다.

<2023. 08. 10>

(1)

정말 무기력한 날.

어제 몬주익성이 꽤나 피곤했는지

아침에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었다.

며칠 째 잠을 자긴 자는데 깊게 잠드는 느낌이 아니다. 아침마다 선풍기에 머리 말리고,

상한 피부 위에 또 화장을 하는 것도 귀찮고

지겹게 느껴진다.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으면,

하루하루 아쉽고 아까워야하는건데..

왜 나는 이 10일도 길게만 느껴지는지.

지금 당장이라도 집에 돌아가서 쉬고만 싶다.

심지어 어제 몬주익 성에 이어

오늘 가는 벙커- 구엘공원도 아주 산꼭대기에 있다.

사실 방금 오르막길 올라오다가 땀으로 샤워하고

잔뜩 지쳐버렸다.

여행도 체력이라는데, 내 체력은 바닥난지 오래다.


(2)

오르막길이 끝난 줄 알았더니만 벙커까지 또 엄청난

오르막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플랜을 잘못 세웠나보다.

정말 너무 덥고 힘들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정상까지 도착해보니 바르셀로나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여유롭게 감상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풍경 한 번쯤은 여행 중에 꼭 만나줘야지! 그리고나서 다시.. 또 내리막길을 한참 내려와

카페로 피신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소화가 안되어서 걱정이다.

몸이 고장난 게 분명하다.

한국 돌아가면 몸 회복에 전념해야지.

조금 이따가는 구엘공원에 간다.

기대가 되기는 하는데...

땡볕에 또 몇 시간 걸을 생각하니

왜 벌써부터 아득한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운차게 돌아다녀도 모자랄 판에.

이런 마음이 드는 내가 너무 밉다.

혹시 나중에 이런 생각을 했던 나를

후회할까봐 걱정이다.


<2023. 08. 11>

(1)

오늘은 아침부터 너무 배가 고파서

바로 밥부터 먹으러갔다. 빠에야 맛집!

처음으로 샹그리아도 마셔봤다.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놀랐다. 내 스타일이야.

알고보니 난 와인파?

빠에야도 저번에 먹었던 것보다 훨씬 맛있어서

싹싹 긁어먹었다. (근데 왜 이렇게 비싸니?)

그리고 본격적인 쇼핑을 시작했다.

시내로 나오니 정말 볼거리도 많고 쇼핑할 곳도 많고.. 내 지갑과 캐리어 공간이 괜찮을지.

그래도 후회없이 사고 싶은 거 많이 사고

기념품도 선물도 사야지.


(2)

나는 예쁘지 않다.

눈물나도록 서글픈 사실이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다. 중학교 때까진 자각하지 못했다.

나 정도면 괜찮은 게 아닌가? 하는 이상한 자신감으로 셀카를 찍던 시절.. 뭐 암튼 그랬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만 몰랐을 뿐

그때도 몇몇 친구들은

내 외모를 비아냥댔던 것 같기도 하고.

흔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미적 기준에,

나는 완전히 다 반대다.

마르지 않았고, 긴 얼굴형에 작은 입술, 쌍커풀 없는 눈. 까무잡잡한 피부 등. 이렇게 다 삐뚤빼뚤할 수가 있나? 심지어 이와중에 배우라는 꿈을 꾸고 있다.

평균 외모보다 더 예뻐도 모자랄 판에,

난 평균도 못미친다.

가끔은 내가 왜 이 꿈을 가졌는지 원망스럽기도 하고, 내 현실을 자각할 때마다 불행해지기도 한다.

만약 조금의 노력으로 내 외모를 바꿀 수 있다면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치려면 손 봐야 할 곳이 한 두곳이 아니니 오히려 힘이 빠지고 아득하기만 하다.

하긴, 다이어트도 몇 년째 실패중인데.

오히려 애매한 못남이라 더 별로다.

포토샵으로 손 본 사진을 올렸을 때,

친구들이 영혼 없는 '예쁘다아!' 라는 댓글을 달 때마다 기분이 참 묘하다.

난 언제나 이상적인 외모를 꿈꾸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다.

현실을 자각하고 또 우울해한다.

외모가 다가 아니라는 사람들은 아마

이 컴플렉스를 절실히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매일 거울 속 나를 마주하는데

어떻게 그게 신경이 안쓰일 수 있겠어?

연기를 꿈꾸지만 않았어도 포기했을 거다.

어떻게든 예쁘게 보이려는 노력을.

그치만 연기를 포기할 순 없다.

그 말은 곧 나를 가꾸는 일도 포기할 수 없다.

언젠가 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온전히 나를 사랑해주고

다른 이들의 외모와 비교하지 않는 날이 올까?

가끔은 이렇게 잘 다듬어진 내면의 내가

아깝게 느껴진다.

껍데기가 아름다웠다면,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2023. 08. 12>

(1)

어젯밤은 정말 괴로웠다.

잠에도 계속 못들고 잤다 깼다를 반복.

머리는 어질어질.

방 안은 쪄죽을 듯이 덥고 배는 고프고..

마음 속으로 얼른 이 밤이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 샤워하는데

샤워커튼이 잘 안쳐졌는지

물이 바닥에 흥건해지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혼이 났다.

물론 내가 잘못한 거니까

내가 물 닦고 사과 드리는 게 맞지만..

갑자기 그냥 불편해졌다.

안그래도 숙소 들어가면 갑갑한 셋방에

갇혀있는 느낌에다가

전기코드가 하나밖에 없어 충전을 하거나

선풍기를 틀거나 둘 중 하나만 할 수 있고

맨날 선풍기에 머리말리는 날들이 불편해죽겠는데..

아줌마 눈치까지 보인다.

남은 일주일이 아쉽지 않다. 얼른 지나갔으면 좋겠다.

게다가 오늘 고딕지구로 가는 지하철 환승 구간 중에, 어떤 남자가 내 휴대폰을 툭 치고 가는 느낌이 났다.

휴대폰 줄을 하고 있어서인지

실제로 뭔가를 빼앗기지는 않았다.

지하철 경비원께서 곧바로 달려와 그 남자를 끌고갔다. 어안이 벙벙하고 심장이 뛰었다.

내가 진짜로 소매치기를 경험할 줄은 몰랐다.

그 잔상이 아직도 또렷하고 다시 떠올릴수록 아찔하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경계를 늦췄다면,

나는 집 가기 일주일 전

휴대폰 소매치기를 당한 여자가 되는 거였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길거리 사람들도

다 무섭게 느껴지고 불편했다.

유럽여행까지 하며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부정적인 사람인걸까?

하루하루 익사이팅하게 재미지게 보내야 하는 건가? 나는 왜이렇게 맨날 모든 걸 계획해두고

그걸 과제처럼 수행하기 급급한 걸까?

여행하며 즉흥적이고 자유로워지고 싶었는데

오히려 더 많이 신경쓰고 불안해하게 되어버렸다.

속상하다.


(2)

오늘은 제대로 바르셀로나를 마주한 느낌이다.

고딕지구 골목 골목마다 가지고 있는 구시가지의 감성. 북적이는 사람들. 다양한 쇼핑센터, 관광지들.

내가 정말 초반에 난이도 높은 관광지를 모두 갔구나. 아-! 사고싶은 게 너무 많다. 선물 사야할 것들도 많고. 예산관리를 잘해야겠다.


(3)

한국시간으로는 벌써 내 생일이네.

언제나 그랬듯 내 휴대폰은 조용하다.

엄마의 메시지말고는.

뭐 요란한 축하나 연락을 굳이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치만.. 이래서 생일이 싫다.

나에게 매우 특별한 날이 됨과 동시에

내가 얼마나 특별하지 않은지를

보여주는 반증같달까?

언제나 생일은 내 기대만큼 특별하거나

요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연락없는 친구들에게 괜히 서운해지고.

특히 내가 상대의 생일을 축하해줬다면

더 그런 마음이 든다.

원래 타인에겐 내가

그닥 큰 존재가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팬들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상한 허상과 같은 기대는 하지말자.

축하나 선물이 의무도 아니고,

그저 신경써서 축하메시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마음에만 온전히 감사하면 된다.

그리고 내일 나를 위한 신나는 하루를 보내면 된다.

나에게는 내가 있으니까.


<2023. 08. 13>

와버렸다! 나의 생일. 와버리고 말았다.

생일인데 오히려 최악의 밤을 보냈다.

무려 새벽 6시까지 잠을 못잔거다.

계속 뒤척이고 몸은 피곤하고 괴롭고.

게다가 타지에서 보내는 생일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선물도 보내주고 연락도 많이 해주길

내심 기다렸는데,

생각보다 휴대폰이 조용해서 또 속상하고.

그치만 생일에 어떤 기준이 있나?

그냥 내 방식대로 맛난 거 먹고

노래 듣고 행복하게 보내면 되는 거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보내고 있다.

연락없는 친구들에게 서운해하기보다는

연락 준 친구들에게 고마워하는 게 더 맞는 일이다.

그리고 어떠한 기준에 맞지 않더라도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다.

그거면 된 거다. 인생은 나 혼자!


**부록 (1)

<나에게 보내는 생일 편지>


흔히 생일은 본인이 태어난 특별한 날이라고 하지만, 생일을 기다릴 때의 기대감과는 달리,

막상 당일이 되면 생각보다 그리 특별한 날이 아님을 입증하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더군다나 나는 로맨틱한 이벤트를 선물해줄

남자친구도, 생일카페를 열어줄 팬들은

더더욱이 없으니.

올해 생일은 신경써서 메시지를 보내준 친구들이

몇 배로 고맙고, 시끌벅적 내 마음을 모르고 지나가는 바르셀로나의 수많은 사람들은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내가 타인에게, 또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 것이 '지혜'라고 한다.

하지만 역으로,

이 세상은 곧 내가 전부임을 깨닫는 것이

'사랑' 이라고 한다.

그 둘 사이를 오가며 내 삶은 나아간다.


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내가 가장 중요하지만

타인에게 나는 일말의 타인에 불과하다는 것.

앞으로도 지혜와 사랑을 마음껏 저울질하는

내가 되길 !

생일 축하한다 나 자신아!


**부록 (2)

처음 유럽여행을 결심할 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나는 애초에 그리 모험심이 많거나

화끈한 유형의 인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저찌 여행을 시작했지만, 나는 여전했다.

유럽에 오면 180도 달라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조금은 소심하고 여전히 조금은 찌질했다.

그렇지만 이런 나를 그냥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여행 전의 나와 완전히 같다고도 할 수 없다.

런던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설렘,

파리에서 만난 친구들,

베를린에서 즐긴 피크닉, 프라하의 굴뚝빵,

밀라노의 화려함, 바르셀로나에서의 피날레까지!

각종 사건사고와 엄청난 외로움을 겪을 때는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었지만,

두 달 반의 홀로 떠난 유럽여행을 무사히 마친 내가

참 자랑스럽다.

여행은 언제나 내가 예상치 못한 것을 선물해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