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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여행 전 일지

by 양양

2023. 06.09 비행기 안에서


오지 않을 것 같더니 왔고, 덜컥 출발해 버렸다.

두려움과 싱숭생숭함을 가득 안고.

벌써부터 쉬운 게 하나 없는 걸 보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변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무섭지만 이 두려움을 직면하고 극복하러 가는 게 아니겠니. 나는 더 이상 너를 스스로의 평범함에 좌절하는 소녀로 놔두지 않을 거야.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좌절하게 두지 않을 거야. 하고 싶은 건 하게 만들어줄 거야.

꿈꾸는 대로 이뤄지게 해 줄 거야. 너는 특별한 사람이니까. 적어도 나는 그 사실을 잘 아니까.

실컷 겪어보자. 실컷 울어보고, 행복해도 보자. 실컷 외로워보자. 나에게 주어진 다신 없을 기회잖아.

내 인생 최고의 두 달 반을 누려 보자!


결심 (1) 남 눈치 보지 말기. 입고 싶은 대로 입고하고 싶은 대로 하기.

결심 (2) 위축되지 않기. 항상 당당하게. 씩씩하게

결심 (3) 음식을 너무 과식하지 않기

결심 (4) 매 순간 용기내기

결심 (5) 자유로워지기

런던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


"아무래도 나 가을쯤에 갈까 봐. 여름엔 비행기 티켓도 비싸고..."

유럽 여행을 보내준대도 안 가려고 핑계를 만드는 사람은 단언컨대 나밖에 없을 것이다.


23세의 나는 대학교 휴학을 결정한 뒤 사방이 꽉 막힌 답답한 시점에 놓여있었다. 당시에는 집 앞 편의점 알바를 하고 있었는데, 내 삶의 반경이 고작 이것밖에 안되나 싶은 생각과 이렇게도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 하루 걸러 오갔다. 내 인생에는 사건이 필요했다. 그즈음 하와이에 살고 계시던 고모께서 잠시 한국에 들어오시는 일이 있었고, 기가 잔뜩 죽어 쭈뼛대는 나를 보고는 유럽 여행을 떠나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하셨다. 배낭 하나 메고 넓은 세상을 경험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 유럽에 가면 조금은 다른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쭈굴거리는 나는 아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무모하게 두 달 반동안 홀로 유럽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패기는 얼마 가지 않아 불안과 걱정으로 바뀌었다. 해외 경험이라고는 친구 따라갔던 일본 여행 정도가 전부인 내가 혼자 유럽을 돌아다닌다는 건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돈이 풍족하지도 않고, 영어 능력자도 아니었다. 나는 오래된 습관을 불러일으켜 또다시 합리화를 시작했다. 나중에 갈래... 알바 그만 두기도 눈치 보이고... 돈도 없고... 상황이.... 등등등. 으유 구차해라. 슬금슬금 포기하려는 나를 발견한 순간, 불현듯 지금 떠나지 않으면 나는 평생 이 정도로만 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강한 예감이었다. 그 후로는 흔들리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추진했다.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체코 프라하- 이탈리아 밀라노- 스페인 바르셀로나.

총 6개의 나라를 두 달 반동안 여행하기로 하고 항공권과 숙박을 끊었다. 나라 간 이동을 위한 기차와 버스표도 끊었다. 필요한 준비물들을 샀고, 각 도시에서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정리했다. 막연하기만 했던 여행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혼자 말도 안 통하는 나라를 여행할 생각을 하면 오금이 저려왔지만 그때는 이미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출발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럽일지를 만들었다. 숙소 위치와 정보, 여행 일정, 맛집 정보 등등을 손으로 직접 쓴 일지다.

이 유럽 일지는 후에, 출발부터 다시 돌아오는 여정까지 나의 가장 든든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무섭던 순간, 외롭던 순간, 너무 맛있는 음식을 먹은 순간, 황홀한 경치를 본 순간.

그 모든 기록이 여기에 담겨있다.

이 일지 속 나의 일기를 이제부터 소개하려고 한다.

직접 손으로 그리고 꾸민 일지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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