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작물, 흰 당근(?)
부진한 우리 밭을 중심으로 옆 집 뒷 집 할 것 없이 고추, 가지, 토마토류가 그득 열렸다. 다 죽어가는 95호 텃밭은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물을 주고 있으니 좀 기다려야 열매를 볼 일이었다. 몸뚱이 만한 조리개로 물을 손수 길어 올리고 있으면, 급수시설에 호스를 연결해 쓰던 아랫밭 아저씨께서(물 뿌림 권위자) 이따금씩 우리 밭에도 한 바닥 소나기를 뿌려주시곤 했다.
밭에서 만난 어른들과의 대화는 액상비료 구매처라던가, 키우는 노하우, 농작물 추천이 주된 내용이다. 경계심이 많은 나지만 다들 친절하시고 유익한 정보들을 알려 주시기에 여러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이번엔 물뿌림 권위자 아저씨께서 머릿싹 올라온 당근을 자랑하며 한 번 키워보라셨다.
그래, 이번엔 당근이다. 한 번 가봐야지 싶었던 씨앗도서관에서 마침 ‘흰 당근 씨앗’을 빌려준다기에 마곡 식물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씨앗도서관이란 존재도 신박했지만 대여 리스트에 소개된 흰 당근은, 좀 낯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황당근은 네덜란드에서 품종 개량 된 것이란다. 당근은 원래 본투비 보라색이며 흰, 노란 계열 당근은 돌연변이라는 사실.
씨앗을 전시하는 법
국내에 총 17개. 씨앗도서관은 '책'을 빌리는 도서관이 아니라 말대로 '씨앗'을 도서관 대출 시스템처럼 빌려주는 곳이다. 빌린 씨앗을 키워 열매가 열리면 씨를 채취해 반납하게 되는데, 이 순환 과정을 통해 대여자가 직접 토종품종을 가꾸고 확산시키는 주최자가 된다. 품종의 결실을 맺고 또 맺어 '기록'되어온 산물이란 면에서 씨앗과 책은 닮은 구석이 있다.
토종 종자가 교잡(다른 종자와 혼종)하지 않고 문화유산으로 보전되도록 가치를 알리기 위한 시설이다. 방문 전엔 식물 종자 2억 여개를 냉동 창고에서 보관한다는 *[국제 씨앗 저장고]를 떠올렸지만, (운영 목적과 규모가 다르기에) 마곡 씨앗도서관은 아담한 공간이었다. 찾아간 날 기온이 30도를 넘었지만, 실내에 있어 빵빵한 에어컨 아래서 시원하게 관람했다. 외부 온도에 씨앗들이 그대로 노출됐다면 팝콘처럼 싹을 틔웠을지도.
(*국제 씨앗 저장고 : ‘최후의 날 저장소(Doomsday Vault)’라 불리는 씨앗 저장소는 전쟁, 자연재해, 농업 경영의 악화 등 온갖 종류의 재난으로부터 곡물 씨앗을 영구 보존하기 위한 곳이다. (기후의 급격한 변화나 핵전쟁으로 곡물 종자가 멸종할 경우 인류가 꺼내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설립됐다.)
쌀 알 만한 씨앗이 도서관 책장에
도서관은 입구에서 한눈에 맵이 보일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다. 우드벽장을 활용해 식료품점처럼 저장병이나, 자루에 한가득 담아 작은 존재를 가시화하거나 돌기나 모양, 색깔 등 특징이 있는 씨앗들을 확대하고 펼쳐 보인다. 작고 평면적인 소재로 도서관이란 공간을 채운다는 건 기획하는 사람의 고민이 꽤 많았을 것도 같다.
사진 오른쪽 아래, 씨앗을 빙 둘러놓은 작품과 곶감의 데빌버전 같은 악마의 솜. 영어 이름도 [devils cotton] 이란다. 이름답지 않게 유용하고 이로운 식물인데 낚싯줄, 밧줄 등을 만들 때 사용되고, 생리통 같은 통증완화에 사용되는 약용식물이라고 한다. (실생활에서 만날 일은 별로 없겠지만 만지면 염증이 생길 수도 있다고 하니 주의할 것.)
팔각, 콩류, 메밀 등 평상시에 볼 수 있는 낯설지 않은 소재들도 있었는데, 원통형 케이스에 뚜껑면을 정면으로 사용해 한눈에 씨앗들의 생김새를 관찰하고 비교하기 쉽도록 전시되어 있다.
흰 당근을 빚졌다.
대출목록 책자에서 흰 당근 농작 관련 정보를 확인하고, 접수처에 대출신청을 했다. 비치된 태블릿으로 개인정보와 기타 내용을 입력하고 나중에 꼭 반납하겠다는 항목에도 체크했다. 이렇게 대출이 또 하나 늘었다. 대출+1. 멀리까지 다녀온 수고로움인지, 씨앗 상환에 대한 의무감인지 다른 씨앗이나, 모종을 심었을 때보다 특별하게 느껴졌다.
손가락 두 마디 깊이로 흙을 파고 씨를 10cm 간격으로 심어주었다. 집게손가락으로 겹치지 않게 한 개씩 집어서 정성을 들였고 흙을 단단히 덮어 물도 충분히 뿌렸다.
씨앗 채무자의 삶
분명 대출 신청 태블릿에 손가락 꾹 눌러 약속했다. 반드시 씨앗을 반납하겠다고. 글을 작성하는 시점 흰 당근을 갚았느냐 묻는다면... 들려줄 것은 긴 침묵뿐. 도서관 대출자 정보에 블랙리스트로 표기되었는지 모른다. (씨앗대출은 반납이 의무이긴 해도 상환불가시 시설 재방문 문전박대 당하거나, 잡아가지는 않는다...(?)
흙 밖으로 올라오지 않겠다고 단단히 토라진 싹의 마음을 알 수가 없다. 남겨두었다가 집 화분에라도 심어 볼 걸 무소식은 늘 아쉽다.
- 변제할 길 없는 흰 당근 씨앗 채무자로부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