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아엎기 장인
고등시절 나는 그림 그려 내신 점수를 받는 시각디자인과 학생이었다. 한 번에 끝까지 그려낸 과제가 없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을 찾아내면 밤을 새더라도 처음부터 다시그려 제출했다. 인생 전반에 걸쳐 작은 일을 할 때에도, 큼직한 선택을 할 때에도 미련의 톳시가 남아있다면 기꺼이 다시 행하며 주위를 뱅글거렸다. 첫 번에 잘 해내는 것 없이, 두 번째는 좀 더 완벽할 거라는 기대감이었다.
어른이 되고 보니 일도, 인생도 '에자일' 방식이다. 두 번, 세 번 다시 시행할 시간적 물리적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남들보다 늦게 깨달은 것 같다. 갈아엎기 장인인 내게 '인생'은 되돌릴 수 없어 꽤나 무거운 과업이지만, 결과보다 과정에 의미를 찾을 줄 아는 안목이 생겨야 살만해진다는 걸 배워가고 있다. 그 퍽퍽한 여정 안에서 내게 도시 텃밭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운영해 볼 수 있고, 갈아엎어 다시 시작해도 되는 느슨한 공간이다.
봄엔 잎채소밭에서 한 여름엔 열매채소밭으로
우리는 봄에 잘 자라준 달콤한 결과에 도시텃밭 농사를쉽게 생각했었다. 농사는 때가 되면 날씨나, 수확기를 기점으로 맛이 변하기에 작물을 바꿔 심어야 한다. 초 여름에 들어설 무렵 기둥 줄기만 남은 상추와, 먹기 좋은 때를 놓친 열무를 걷어내고 퇴비 솎아 영양 좋은 밭으로 재정비했다.
관리처에서는 임대 기간 중 딱 두 번, 봄과 초가을에 씨앗이나 모종을 배부해 준다. 두 계절 사이 여름은 자율적으로 심을 작물이 필요하단 뜻이다. 수박을 심어 볼까 했지만 넝쿨을 치며 옆으로 자라는 열매채소는 다른 밭에 피해를 주기 때문에 작농금지였다. 뭘 심을까 귀동냥 눈동냥 해보니 주변은 가지, 고추, 토마토 등으로 추려졌다. (때문에 열매가 달리고 나면 밭 모습들도 비슷비슷하다.)
그렇게 급하면 마트를 가지 그랬슈.
열매채소 모종을 심는 시기는 초여름 넘어가는 사이가 좋다. 장마철 전에 새 흙에 뿌리내려야 비바람을 견디기 때문. 장마 오기 전 마지막 주말 충청도 어느 농부님께 방울토마토, 청양고추, 피클 담아 먹을 할라피뇨, 피망 모종을 새벽배송으로 주문했다.
차로에서 과속하는 운전자에게 "그렇게 급하면 어제 오지 그랬슈" 한다는 충청도식 개그가 유명한데, 느림의 미학을 아는 동네에서 살아있는 모종이 새벽같이 온다니 왠지 고마웠다.
장마 전에 작물을 심으면 뿌리내릴 때쯤 힘들이지 않고 물을 충분히 공급 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열매채소는 자랄 때 잎채소보다 훨씬 많은 양분(퇴비)과 수분이 필요하다. 올 여름은 진짜 진짜 더워서 물을 흠뻑 주고 돌아서면 금방 겉흙이 말랐다.
여름 농사는 물 주는 시간 대도 중요하다. 산행하시던 어른이 낮에 물 주고 있는 내게 "여름엔 한낮에 물을 주게 되면 맺힌 물방울이 빚에 굴절돼서 까맣게 타버려요" 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수분이 마르는 간격대비 뜨문뜨문 물을 주었던 탓도 있고 고춧잎이 누렇거나 까맣게 말라갔다.
주변 밭에 작게 달린 고추, 토마토가 눈에 띌 쯤이었다. 우리 텃밭 모종들이 거듭 마르는 보고 "곧 죽으려나.." 했다. 충청도에서 올라온 방울토마토가 "그렇게 급하면 마트에서 사다먹지 그랬슈."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아랫밭 별이 아저씨께서 부진한 우리 밭을 보고 물이 많이 필요하다길래 매일 새벽 물을 길어올리게 되었다.
과연 죽어가는 95호 텃밭은 내 노력에 답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