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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슬 Oct 02. 2022

Life vest under your seat Ⅰ

    주변에 양해를 구하고 한 시간 반 일찍 회사를 나선 건 정신과에 가기 위해서였다. 심리상담 비용과 정신과 진료에 관해 알아보며 동시에 피해 주지 않고 자살하는 법을 검색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칠 년 넘게 심한 폭식증과 불안증을 앓았을 때도 나는 정신과를 찾지 않았다. 내겐 보험이 없었고 그래서 앞으로 들어야 할 보험이 있을 듯했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정신과 진료실 의자에 앉혀야 한다는 인지와 의지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지금 당장, 일 분이라도 더 빨리 정신과에 가야겠단 생각을 한 건 일시적인 각성에서였다. 일시적이라기엔 너무 깊고, 일시적이라서 가능한 최고 수치의 인정. 내가 너무 많이 망가져 있다는.


    다행히 정신과에 가게 된다면 이곳으로 하겠다 정해둔 병원은 예약제가 아니었다. '6시가 접수 마감이니 그전에만 오세요. 대기시간은 삼십 분이 넘을 수 있어요.' 병원에 도착하니 다섯 시였다.

    진료를 받기 전, 간단한 설문지를 받고서 대기실 소파에 앉았는데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버스에서부터 시작된 눈물이 병원에 도착하니 더 발광이었다. 무교인 내가 교회에만 가면 누구보다 열심히 우는 것처럼, 이곳이 마음 놓고 울어도 되는 자리처럼 여겨져서였다.

    내가 예상한 정신과 대기실의 모습은 그곳에 대기 중인 모두가 죽상인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나뿐이었고,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돌아보거나 힐끗거리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 역시 정신과 대기실이라서 가능해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읽어 내린 설문지에는 간단한 체크박스들이 이어져 있었다.

    □ 5년 안에 생명보험에 가입할 일이 있나요?

    □ 사관학교에 입학하거나 경찰공무원에 응시할 계획이 있나요?

    ...

    여러 개의 체크박스 중 난 단 하나의 체크박스에만 표시를 했다.

    ■ 앓고 있는 질환이 있나요?

    이어서 기타란에 이렇게 적었다.

    기타. 폭식증(진단 X)

    대기하는 사이 접수가 마감되고, 나는 끝에서 두 번째 환자였다. 마지막으로 접수한 그가 나와 같은 초진이라는 점 그래서 내가 내 할 말을 다 했다간 자칫 그의 발언 기회를 뺏을지 모른다는 걸 걱정하는 와중 내 이름이 불렸다.


    살면서 정신과 의사를 실제로는 처음 보는 나로서는 책상에 앉아 있는 그가 너무나 내가 상상한 대로여서 좀 놀랐다. 동그란 안경, 하얀 피부, 무해한 미소. 지친 기색 없이 가볍게 앉아있는 그가 내게 첫인사를 건넸다.

    “이슬 씨, 안녕하세요. 병원은 처음이신 거죠? 그런데 눈이 왜 이렇게 빨개요?”

    “아. 밖에서 좀 울어서요.”

    조용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까지 상상한 그대로였다.

    “어떤 것 때문에 오셨어요? 제가 어떤 걸 도와드리면 될까요?”

    “얼마 전에 남자친구랑 헤어졌는데요. 헤어지는 과정에서 제가 일방적으로 많이 매달렸거든요. 그러면서 헤어짐의 이유에 대해서 그 친구와도 얘기를 하고, 저 스스로도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란 게 제가 익히 알고 있는 저의 모습, 고치고 싶은데 잘 고쳐지지 않는 저의 싫은 모습들이었어요. 그 친구랑 저랑 서로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건 머리로는 알겠는데, 그걸 뺀 나머지는 제 문제 같거든요. 그런데 제가 지금이라도 이걸 고치지 않으면 이런 과정이 계속 반복될 거잖아요. 그래서 고치고 싶어서 왔어요.”


    “말을 조리 있게 잘하시네요, 이슬 씨.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셨나 봐요. 그럼 그 문제라는 건 뭘까요?”

    “저는 긍정적이지 않아요. 제 방어기제 같은데, 남을 탓해요. 불평도 많고, 감정적이고, 과거에 집착해요. 과거가 유일한 제 핑곗거리예요. 제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나는 이런 과거가 있으니까 괜찮아 하고 자위하는데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거든요. 이게 잘못됐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제가 이전에 다니던 직장이 어려워져서 제 의지가 아니게 일을 관두고 사 개월 정도 집에서 쉬었는데, 되게 무기력하게 지냈거든요. 저 나름대로는 이겨내려 했는데 잘 안됐고, 그런 제 옆에서 상대방도 같이 무력했을 것 같아요. 감추려고 노력해도 애인은 감정적으로 제일 가까운 사이니까 다 느껴졌을 거고요. 누구보다 절 믿었을 거고, 힘이 되어주고, 같이 이겨내고 싶었을 텐데. 이 친구한테 이렇게까지 매달린 것도 제가 이별이 힘이 드니까 얘를 같이 끌고 들어가려 한 것 같아서 미안해요.”


    나는 자칫 내가 남자한테 차여서 이렇게까지 망가져 버린 사람처럼 보일까 걱정되었다. 실연의 아픔 역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컸지만, 그건 내 몫일 뿐 징징거릴 수 없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별이 일종의 트리거 역할을 했으며, 내 문제를 현실에 앉혔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런 걱정이 무색할만큼 이어지는 그의 말은 꽤 큰 충격이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고칠 게 너무 많아서요, 이슬 씨. 이걸 언제 다 고치나.”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문제투성이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장기전이 되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올걸. 순자한테 말을 해야 하나. 하지만 순자는 얼마 전에도 애인이랑 헤어져서 손목을 긋고 응급실에 실려온 젊은 친구가 있다며 진절머리를 쳤는데...

    허망한 내 표정을 읽은 그가 웃으며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제 말은 그걸 다 고쳐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잘못된 전제 같아서요. 보완을 하기는 해야겠지만, 김이슬 씨의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거든요.

    제가 이슬 씨를 처음 봐서 잘은 모르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이혼을 하고, 그럼 그 이후의 생활이 힘들지 않았겠어요?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을 거고,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도 위축되는 부분이 있을 거고.

    이십 대를 폭식증으로 고생했다는 건 심리적인 거거든요. 많은 경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그런 게 상처가 될 때, 폭식증을 겪어요. 그런데 그걸 김이슬 씨의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어요?”


    신기하게도 그의 말은 이미 내가 스스로에게 여러 번 해 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나를 변호하고 싶을 때마다 하던 말. 나도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야. 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그러나 이런 식으로 나를 변호할수록 되돌아오는 건 더 큰 죄책감이었다. 모두가 나 같지는 않으니까. 비슷한 환경에서도 씩씩하게 이겨낸 이들이 존재하니까.


    용기 내 현실을 직면하려 온 이곳에서 내가 나를 위로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가 나를 위로하려 한다는 게 이상하리만큼 절망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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