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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슬 Oct 04. 2022

약은 삼키고 슬픔은 뱉어 Ⅰ

    약봉지와는 삼십 분째 대치 중이었다. ‘아침 식사 후 30분’이라 적힌 글자를 노려보며, 시계는 오전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두 가지를 고민했다.

    첫 번째.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는데 약을 먹어도 될까?

    두 번째. 약을 먹지 않고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두 번째는 간단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을 한참 넘었다고 생각한 지 오래였다. 죽고 싶어요 혹은 살고 싶지 않아요 대신 고치고 싶어요 라고 말한 건 내가 날 주체할 수 없으니 당신이 제발 나를 좀 도와달란 거였다.

    다만, 진료를 보는 것과 약을 받는 것 그리고 약을 삼키는 건 별개로 장벽이 높았다. 그중에는 단연 약을 먹는 게 제일 어려웠다. 삼키면 정말 되돌릴 수 없을 텐데...!     


    하지만 무엇을? 나는 내가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단 사실에 패배하기 위해 정신과로 달려갔다. 의사 면허증이 있는 그가 ‘당신은 패배했습니다!’ 으름장 놓기를 바라며, 내가 별수 없이 납득하길 바라며. 그러나 그가 그리고 내가 앞으로 닥칠 일들에 대해선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기를 바라며 말이다.     


    문제는 첫 번째였다. 아침 식사.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못한 지 여러 날이었다. 심한 폭식증을 앓을 땐 폭식과 절식을 번갈아 했다. 폭식은 통제할 수 없었고, 절식은 그런 내게 내리는 처벌이었다. 오랜 기간 섭식장애를 앓은 사람은 본능적으로 안다. 먹는 것으로 또 먹지 않는 것으로 자해를 하고 있진 않은지를.

    그러나 이번엔 결이 달랐다. 처벌이나 자해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음이었다. 음식이 기도를 넘어가는 게 불편했고, 명치와 왼쪽 가슴 중간쯤 새로운 장기가 하나 생긴 것 같았다.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아 식욕을 참지 않아도 되었다.

    폭식증과의 공통점이 있다면 슬픔이 식욕을 넘어서는 거였다. 놀랍게도 폭식은 슬픔이 우세해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약을 삼킨 후에도 놀라우리만큼 모든 게 여전했다. 슬픔이 그대로 고여 찰방찰방했다. 순간 당장은 아무 효과도 없을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체내에 약 성분이 어느 정도 쌓여야 슬픔을 토해낼 수 있는 걸지 몰랐다.

     

    첫 진료를 마무리하며 그는 내게 숙제 두 개를 건넸다.

    ‘검사지인데요. 다음 진료 때까지 해오시면 돼요.’

    커다란 서류 봉투엔 문장완성검사(성인용)와 MMPI-2, 다면적 인성검사Ⅱ라고 적힌 두툼한 검사지가 들어있었다. 대충 이런 식이었다.


    <문장완성검사(성인용)>

    14. 무슨 일을 해서라도 잊고 싶은 것은 ___________

    38. 행운이 나를 외면했을 때 __________________


    <MMPI-2, 다면적 인성검사Ⅱ>

    ⓞ그렇다 ⓧ아니다

    33. 건강에 대해 거의 염려하지 않는다.

    41.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보기만 해도 머리 아픈 문장들이었지만, 해야 할 게 있는 부채감이 좋았다.


    퇴근 후 옷도 갈아입지 않고, 검사지를 들고서 집 옆 공원으로 향했다. 이맘때쯤 나는 좁은 방 안을 빙글빙글 걸을 때가 많았다. 남는 시간과 마음을 무엇에 쏟아야 할지 몰라 불안하고 허전했다. 친구들에게 푸념을 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구조 사인은 여러 번 보낼수록 퇴색되므로 남발할 수 없었다.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무리 속에 섞여야 했다.


    공원에 위치한 두 개의 농구대 앞은 땀을 뻘뻘 흘리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는 그 앞 벤치에 자리를 잡고 검사지를 꺼내 하나씩 빈칸을 채워넣었다. 쿰쿰한 땀 냄새와 시원한 가을 냄새가 동시에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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