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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슬 Oct 06. 2022

약은 삼키고 슬픔은 뱉어 Ⅱ

    문장의 뒷부분을 완성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쓸 말이 많아 한 줄을 넘기기도 했다.

 

    7. 내가 어렸을 때는 해맑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게 몇 개 있었다.

    13. 나의 어머니는 불쌍한 사람, 최선을 다했으나 본인의 최선일 뿐 나의 최선은 아니었음.

    14. 무슨 일을 해서라도 잊고 싶은 것은 잠깐 모르는 사람 집에 살았을 때.

    41. 나의 평생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안정감을 느끼는 것.

    43. 두려운 생각이 나를 휩싸일 때 과거가 재생됨.

    50. 아버지와 나는 뭘까.

  

    문제는 인성 검사였다. 답해야 할 문항이 무려 567개였다. 이쯤 되면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의도한 건가? 우울할 틈이 없게 혹은 인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게? 정말 의도한 거라면 그 작전은 성공이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병원에 가서 우울증이 싹 다 나았다고 말하고 싶었으니까.

    정말이지 그러고 싶었다.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교묘하게 이중부정 된 문항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가뜩이나 하나에 오롯이 집중하기 힘든 머리가 더 핑핑 돌았다.


    내 머릿속은 24시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자면서도 생각 중이란 게 느껴질 만큼 그랬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 잠들기 전 한 생각이 자동 재생되었다. 너무 많은 생각이 동시에 회전했다. 일할 때, 빨래 널 때, 세수할 때, 심지어 통화 중에도. 내가 지금 무슨 생각 중인지를 알려면 두더지 게임 속 두더지를 때려잡는 심정으로 집요하게 잡아채야 겨우 알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적막할 수 없는 일상에 나 혼자 부산스러웠다.     


    그런데 567문항이라니.


    ⓞ그렇다 ⓧ아니다

    28. 위산과다나 소화불량으로 고생한다. ⓞ

    35. 어렸을 때 가끔 물건을 훔쳤다. ⓞ

    41.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

    453. 거미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

    456. 비싼 옷을 입어 보고 싶다. ⓧ

    459. 남들만큼 나도 고통을 참아 낼 수 있다. ⓞ

    461. 문의 자물쇠 고치기를 좋아한다. ⓧ     


    “검사지 해오셨나요?”

    “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으셨나 본데요. 빽빽하게 적으신 거 보니까.”

    “인성 검사는 너무 많아서 힘들었어요.”

    “좀 많긴 하죠? 이건 제가 따로 채점을 해야 해서 다음 진료 때 말씀드리는 걸로 하고요. 그때 왔다 가신 이후로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오늘은 좀 괜찮고요. 나머지는 똑같았어요. 그리고 심장이 좀 세게 뛰고, 몸이 자꾸 떨려요.”

    “주로 언제 그러세요?”

    “생각하면 그래요. 죽을 것 같지는 않은데 좀 버거워요.”

    “불안할 때 먹는 약을 좀 드릴게요. 필요할 때만 드세요. 큰 문제는 아닌 것 같고,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것 같아요. 그분과는 정리가 좀 되셨을까요?”

    “그날 집에 가서 미안하다고 했어요. 일방적으로 매달리고 그런 거요. 저는 그거라도 해야 했으니까 한 건데 걔는 힘들었을 거잖아요.”


    “그러면 이제 머릿속으로는 정리를 끝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끝내야 하니까요. 그런데 생각은 계속 나죠. 저는 사진보다는 글자가 더 의미가 커서 걔랑 나눴던 대화들을 자꾸 읽게 되는데요. 최근 대화들을 보면 감정적이고 징징거리더라고요.”

    “징징거려요?”

    “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닌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가 날 정말 사랑하는 게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제가 한 행동들을 객관적으로 보면 보호자한테 하듯이 했더라고요. 상대가 제 보호자라고 생각한 거 같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렇게 따지면 저는 보호자가 절 떠난 거라서 감당이 안 되나 봐요. 미성숙한 거죠.”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이슬 씨가 한 행동들이 뭐가 그렇게 미성숙한 건지.”

    “이 관계에서 저는 미안함보다는 죄책감이 더 커요. 그런 게 필요 이상으로 느껴져서 그것도 제 문제 같아요.”

    “그런데 보통의 연인 간의 관계에서 비슷한 걸 하지 않나요? 감정적으로 힘든 게 있으면 힘들다고 얘기하고, 감정적으로 가까워지면 보호자처럼 기대기도 하고요. 어떤 부분에 있어선 이슬 씨가 과한 게 있었을 수 있지만, 이게 다 잘못은 아닌 거 같아요. 너무 그 친구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걔를 이해해야 제 마음이 편하잖아요. 이 상황이 납득이 가면 좋겠는 거예요. 그래서 걔 입장에서 생각을 하다 보면...”

    “자신을 나쁜 사람 만들게 되잖아요.”
    “맞아요.”


    “제가 들었을 때는 너무 다 평범한 이야기들이에요. 저도 힘든 일이 있으면 집에 가서 와이프한테 이야기해요. 와이프도 저한테 이야기하고요. 그건 감정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공유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잘 안된 이유는 다 이슬 씨 잘못은 아니에요. 혹여나 이런 일들 때문에 그런 걸 안 하는 게 성숙한 거라고 생각하실까 봐 좀 걱정돼요.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요.”

    “그런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하면 끝이 없잖아요. 저는 지금까지 그러기만 했어요. 뭐가 문제인지 몰랐어요.”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건강하게 자기방어를 하라는 거예요. 지금 이슬 씨는 너무 치우쳐 있어요. 관계가 끝난 것에 대해 많은 것을 본인 탓으로 끌고 가고 있어요. 본인이 괴로우니까 그러시는 거 같아요.”


    “저는 혼자가 무서워요, 선생님.”

    “여러 경험이나 상처 때문에 그러신 것 같아요. 하지만 혼자 있을 수 있는 힘을 좀 길러야 해요. 그래야지만 누군가를 만날 때 온전히 만날 수 있어요. 이렇게까지 힘들지 않을 수 있어요.”

    “그 힘은 어떻게 길러요?”

    “지금 기르고 있어요. 지금 하는 중이에요.”          



    조금 더 두툼해진 약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자 책상 위에 펼쳐진 노트가 보였다. 거기엔 그간 생각을 정리하며 쓴 메모가 있었다. 모두에게 거리를 두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적은 메모였다.      

    주변을 잘 챙기나? No.

    주변에 좋은 영향을 주나? No.

    주변이 나로 인해 행복한가? No.     


    관계의 상실에서 오는 죄책감은 관계를 유지함으로 얻는 행복보다 힘이 셌다. 사고가 유연하지 못하게 한 방향으로만 흘렀다. 어쩌면 이것 역시 건강하지 못한 자기합리화의 한 종류일지 몰랐다.     

    하필이면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 상대가 날 떠났다 → 누구라도 언제든 날 떠날지 모른다 → 하필이면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문득 처음으로 이런 내가 궁금했다. 왜 이런 식의 자기합리화가 익숙한지, 어디에서 오는 죄책감인지. 상대의 마음만큼이나 내 마음도 잘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지독하게 다시 혼자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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