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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슬 Oct 03. 2022

Life vest under your seat Ⅱ

    기내 좌석에 앉으면 바로 보이는 문장을 사랑한다.     


    Life vest under your seat

    구명조끼는 좌석 아래에 있습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 이 문장을 찾아 헤맨다. 아직 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한 일이 없어서 구명조끼를 본 적도 만진 적도 없지만, 누구도 아닌 당신의 구명조끼가 멀리도 아닌 바로 당신의 자리 아래에 있다는 걸 설명 듣는 일이 마음을 든든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슬 씨? 듣고 있어요?”

    “아, 네. 머리로는 다 알겠는데 적용이 안 돼요, 선생님.”

    “그럴 수 있어요. 밤에 잠은 잘 주무세요?”

    “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잠을 좀 참아요.”
    “일부러 안 잔다는 건가요? 잠이 안 와서 괴롭지는 않아요?”

    “잠이 안 와서 괴롭다기보단 잠을 안 자면 생각을 하게 되니까 괴로워요.”

    “잠을 잘 수 있는 약도 좀 필요할까요?”

    “아니요. 그건 제가 버텨볼게요.”

    “어떤 약이든 이슬 씨에게 도움이 될만한 약이 있으면 복용하길 원하시나요?”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

    “지나치게 의지하게 될까 봐 걱정되세요?”

    “네. 그런데 저는 제 상태가 나아지는 게 조금 무섭기도 해요.”

    “그건 무슨 말이에요?”

    “우울하거나 불안한 게 나아지는 거잖아요. 분명 제가 바라는 상태일 거고 너무 좋을 텐데, 저는 지금의 상태가 익숙하니까 그게 잘 상상이 안 가기도 하고 그러니까 조금 무섭고 그래요.”     


    문득 며칠 전, 다정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자꾸 네가 괜찮아지는 걸 무서워하는 거 같은 거야. 그런데 이슬아. 괜찮아지는 방식으로 힘들 수도 있잖아. 네가 괜찮아지는 방식으로 힘들 수도 있는 거야.’


    “제 생각은 이슬 씨가 약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이 있는 게 아니라면 약간의 약을 복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약은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는 해요. 아까 숨쉬기가 조금 힘들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것에도 도움이 될 거고요.”

    “무슨 약을 처방해주시는 거예요?”

    “제가 생각하는 약은 항우울제예요. 폭식에도 조금 도움이 될 거예요. 약을 먹는다고 바로 긍정적으로 변하거나 기분이 좋아지거나 하진 않아요. 그건 마약이죠. 다만 힘듦의 정도가 좀 덜하게 도와줄 수 있어요.”


    약 복용은 내가 정신과 문턱을 넘기 힘들게 한 여러 요소 중 하나였다. 단약(약을 끊는 것)이 겁나서였다. 실제로 정신과 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는 단약에 실패한 후기가 하루에도 몇십 건씩 올라왔다.

    과연 내가 약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견뎌야 하는 내 모습 리스트에 단약에 실패한 나를 추가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말은 내 물음과 의심을 단박에 가라앉히기 충분했다.

    “크게 봤을 때는, 이런 문제로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성장 과정에서의 어떤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반복되는 거예요. 그래서 본인도 억울한 거예요.”

  

    줄곧 울고 있던 나는 순간 눈물을 그쳤다. 그가 나를 이해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 억울함을 알고 있단 게 벅차게 행복해서였다.

    언젠가 왜 글을 쓰기 시작했냐는 질문에 내 이야기를 나만 아는 게 억울해서라고 답할 만큼 나는 자주 이유 모를 억울함을 느꼈다.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나조차 모르다가 최근에서야 알았다. 실은 나는 나를 맘껏 기특해하고 싶다는 것. 결과물이야 어떻든 여기까지 삶을 끌고 온 나를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고 싶다는 것.

    최선을 다한 게 이거여서, 내가 나를 마음 놓고 예뻐할 수 없어서 찾아오는 억울함이었다.


    조그만 초록색 알약과 함께 정신과를 나서니 해가 다 진 저녁이었다. 진이 빠진 채로 집 옆 공원을 한 시간 더 걸었다. 하나의 길이 계속되는 길. 산책을 나온 모두가 같은 길을 걷는 길.

    그러나 공원의 중앙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들어갈 수도 있었다. 길이 아닌 곳으로, 잔디나 잡초를 밟고서. 그렇게 들어간 사람들은 자신의 개와 함께이거나 혼자였다.


    첫 진료는 내가 짐작한 범위 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내 얘기를 어느 정도 할 거라는 것, 얘기를 들은 그가 나를 위로할 거라는 것, 약을 처방받을 거란 것, 다음 진료를 약속할 거란 것.

    다만, 확인한 기분이었다. 내 구명조끼가 내 좌석 아래 있다는 걸, 손을 뻗으면 손끝에 닿을 거란 걸. 그리고 마침내 내가 나를 구하려는 구조활동에 뛰어들었다는 걸.


    걸어온 길 대신 공원의 중앙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되돌아가는 길과 멈춰있는 길 말고도 하나의 길이 더 생긴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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