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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May 27. 2018

꼰대 상사 의전하기

꼰대 상사와 출장 편

푸르른 5월 미세먼지가 걷힌 푸르른 하늘, 선선한 바람과 함께 나비와 꿀벌도 꽃 잔등에 앉아 한가로이 봄을 즐기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모든 직장인들이 그러하겠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이 다가와도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느라 계절의 바뀜도 모른 채 그렇게 하루하루를 바삐 살아가고 있겠지요. 저 또한 봄이 찾아왔는지도 모르게 바쁜 5월을 보냈습니다. 


출장과 교육으로 자리를 오래 비우고 돌아온 사무실, 여느 때와 같이 한 달 마감 실적을 점검하고 마감 보고서 및 각종 회의 자료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날이었습니다. 팀장님께서 "이번 아시아지역 상품 회의에 누가 출장 가면 좋을지 의논합시다"라는 이메일을 각 워킹그룹(팀 내에 업무 영역별 나누어 놓은 세부 팀) 장들에게 보내왔습니다. 저는 방금 출장과 교육으로 자리를 오래 비운지라 우리 워킹그룹(정확히 말하면 '나')은 이번 출장에는 제외되겠지....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다른 워킹그룹에서 가야 한다고 당연히 생각했으니 말이죠. 점심식사를 하며 팀장님은 누가 가면 좋을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워킹그룹장들에게 의견을 물었고, 저를 포함한 다른 워킹그룹장들은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출장은 전무님과 함께 출장을 가야 하는 그야말로 '고난이도' '할피정출(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정답인 출장)'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방금 출장에서 돌아온 저는 '안심'하면서 "팀 내 상품 담당자가 가면 좋지 않을까요?"라고 내일 아닌 듯 대답했습니다. 팀장님은 끄덕끄덕 이시며 "이번 출장은 향후 출시될 전략 상품을 사전 점검하는 것이기 때문에 향후에 그 업무를 담당할 사람이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네"라고 하시며 역시 더더더 '고난이도' 출장임을 암시하셨습니다. 


오후가 되어 정신없이 출장 결과 보고 및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쁘게 보내는 와중에 팀장님께서 긴급히 제 자리에 오셔서 격앙된 목소리로 '빨리 출장 준비하고, 전무님 항공/호텔 점검해서 출장 계획안 올리고, 의전 계획 포함해서 출장 자료 만들어 올리세요." "네네? 잠깐만요. 제가 가나요?" "응. 시간 없으니까 오늘 안에 출장 계획안 올리세요." 회사 생활 적지 않게 했지만 이럴 때마다 정말 짜증이 용솟음칩니다. 밑도 끝도 없이 '왜 저인 가요?'라는 질문에 시원하게 대답도 들을 수 없이 그렇게 또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게 대기업 해외영업의 '현실'입니다. 


누구는 '능력 있으니' 전무님과 함께 출장을 가도 팀장님이 안심할 수 있어서 이다, 누구는 향후에 중요한 업무와 연계되니 '키워주려고' 일부러 출장을 보내는 것이라고, 덕담(?)을 하지만 정말 출장이 무슨 옆 동산 산책 가는 것도 아니고 너무너무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일이어서 할 수만 있다면 'No!'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적당히 능력이 있어서' 팀장님이 굳이 안 가도 크게 전무님이 개의치 않을 것이면서, 팀에 오래 비워도 업무에 지장이 없거나 아니면 다시 노예근성으로 빠르게 캐치업 할 수 있어서 보내는 게 아닐는지 괜히 심술궂게 생각을 해 보면서도 손은 이미 부랴부랴 출장 계획안을 만들고 있습니다.(이쯤 되면 정말 노예인가... 의심을 해봐야 할 것 같네요..)


가지고 있는 모든 자료를 최신 동향으로 업데이트해서 출장 자료를 만듭니다. 상품 회의 안건, 출장 간 김에 만나게 될 파트너사와 회의 시 협의할 내용, 방문하게 되는 파트너사 정보, 사업 현황, 그리고 출장 가는 국가의 경제, 정치, 사회 동향 등을 포함시킵니다.(이런 내용은 KOTRA나 해외공관 홈페이지에 가면 상세히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의전 계획안에는 이동 동선 거리, 시간, 방법을 10분 단위로 세세히 표기하며 혹 시간이 남을 시 방문할 만한 장소 정보도 넣습니다.(여행사 사이트 참고해서 시간과 동선을 고려하여 넣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출장을 다녀와서 보고할 출장 결과 보고 초안도 미리 작성하여 보고 드립니다. 출장을 가기도 전에 어떻게 결과를 예측하고 보고하느냐고요? 사실 이게 가장 어려운 부분인데, 출장을 가는 목적과 의도를 파악하여 협의하고 싶은 내용, 얻고 싶은 결과를 잘 매칭 하여 미리 작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력과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고, 어떤 결과를 얻어 내고 싶으냐를 윗사람의 입장에서 잘 생각해서 녹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에 따라 능력이 있고 없다고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저는 가끔 '스토리텔링'을 잘 하는 '논리적인 글쓰기' 능력이 아주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전무님의 항공/호텔 예약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비행기는 어느 항공사를 선호하시는지, 좌석은 창 측을 선호하시는지 복도 측을 선호하시는지, 호텔은 흡연방인지 금연 방인지를 미리 알고 예약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수행 의전 출장을 하는 사람이 꼼꼼히 챙길수록 'Bonus'를 얻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전무님은 비즈니스석을 이용하시고, 통상 수행하는 사람(저)은 이커노미석을 이용합니다. 현지 국가 도착 후 현지 법인에서는 에이전시를 두어 VIP 수속을 진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VIP 수속이란 줄을 서지 않고 이미그레이션 부분을 별도로 신속히 통과할 수 있는 절차를 말하며 아직 개발도상국에서는 수수료를 내면 이 수속을 밟을 수 있습니다. VIP 수속에 앞서 전무님은 빛의 속도로 비행기에서 내리실 것이기 때문에 의전하는 사람은 이커노미석의 맨 앞자리를 반드시 예약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무님이 '나'를 기다리며 수행하게 될 처지에 놓일 수도 있기 때문에 비행기 문이 열리면 비즈니스석에 뒤이어 바로 내릴 수 있게 맨 앞자리를 반드시 석권해야 합니다. 또한 짐을 부치면 안 됩니다. 파트너사를 만나게 되면 전달한 선물 등 많은 짐이 내 트렁크에 들어가겠지만 어떻게든 핸드캐리를 하고 비행기에 타야 전무님의 속도에 맞추어 쫒아갈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하루 출장 가나 이틀 출장 가나 들고 가야 할 짐이 많지요. 화장품도 챙겨야 하고 의상에 따라 신발도 달라져야 하지만, 수행 출장일 경우 짐을 최대한 줄여야 합니다. 코디도 심플하게, 신발도 편안하지만 예의 있는 자리에 걸맞게 1개만 선택하는 등 프로페셔널해 지기 위해서는 작은 것에서도 효율화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무님은 '여자' 직원과 출장 가는 것이 처음이라고 하십니다. 저로선 더더욱 부담이 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전무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전무님도 나름 '기대'와 '불편함'이 있으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회사 생활을 하시면서 모든 선배 후배들이 남자 직원이었을 것이고, 출장을 갈 때도 같은 성별의 후배 직원이 의전을 담당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겠지요. 특히나 의전은 업무 외적으로 챙겨야 하는 부분이 많은데, 예를 들면 운전을 한다던지, 짐을 들어들인다든지, 개인적인 심부름을 한다던지 등등 말 그대로 편하게 부릴 수 있는 사람을 수행자로 지정하는 것이 팀장들의 역할이었지요. 요즘 시대에 저런 업무 외적인 것을 회사 직원에게 시켜도 되는지의 당위성부터 지적하는 것이 옳을지는 몰라도 당장 현실을 현명하게 대처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수행하게 되면 저런 부분을 어떻게 해결할까부터 고민하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인 고민이라고 생각되고, 저는 운전도 하면 되고, 짐이 내가 감당하지 않는 선이라면 들어들이고 아니면 카트를 이용해야겠구나.. 개인적인 심부름은 범위가 다양하니 케바케(Case by case)로 대응하자라는 식으로 다부지게 마음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상사와의 출장이 처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름 스스로 터득한 노하우도 있었고, 무엇보다 쫄지 않는 근성과 케바케 상황에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무님은 프레스티지 수속을 밟고 라운지로 직행하십니다. 다른 출장자들도 있었지만, 수행자인 저는 전무님과 함께 라운지에서 탑승을 기다립니다. 전무님과의 독대의 시간, 저도 어색하지만 전무님도 어색하시겠지요. 라운지 음식을 가져다 놓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십니다. 요즘 회사 경영진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트렌드와 본인이 이루고 싶은 업무 방향성 등 업무적인 것부터 가족 이야기, 부동산 이야기 저는 '굿 리스너'로서의 역할을 잘 하기 위해 공감되는 부분은 솔직하게 의견도 말씀드리고, 주니어로서 느끼는 조직생활의 어려운 점 등도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수줍게 꺼내시는 가족 이야기 특히 장성하신 자녀들 이야기에서 흐뭇해하시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옆집 아저씨 같으십니다. 공항에 일찍 도착한 지라 라운지에서 2시간 정도 시간이 있었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해도 공백을 채우기는 어렵네요. 친구와의 2시간이었다면 금새 시간이 지나갔겠지만 어려운 분과의 대화를 2시간 이상 끌기가 버겁게 느껴집니다. 저만 그렇지 않았겠지요. 전무님도 같은 심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지어집니다. 


라운지에서의 긴 대화가 전무님과 저 사이에 그래도 나름 '라포(rapport)'를 형성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이후에 전무님께서 편하게 업무 지시도 하시고, 오롯이 의전을 저에게 맡기시는 것 같았습니다.  


현지 공항 도착 후 저는 발 빠르게 비행기에서 내려 전무님을 쫒아가는 데에 성공을 했습니다. 현지 VIP 수속을 밟고 공항을 빠져나가 법인의 주재원과 만나 호텔로 향하는 의전차에 탑승을 하였습니다. 호텔에 도착해 아침에 만나 조식을 함께 하기로 하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로서 첫날의 의전이 무사히 끝났습니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어깨를 내려놓으니,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내일 일정을 사전 점검하고 알람을 맞추고 잠자리에 듭니다. 


아침 6시 30분 전무님과 조식을 하는 자리에, 법인장님과 주재원 분도 함께 합니다. 오늘의 일정과 방문 장소에 대한 브리핑 시작으로 공식 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호텔의 조식은 무엇이 맛있는지, 한국인 입맛에 맞는 음식은 무엇인지 생과일주스는 어떻게 주문하는지 등에 대해서 주재원이 자연스럽게 설명을 하십니다. 하루 일찍 오신 주재원은 전무님을 위해 미리 사전 체크를 한 것이라고 후에 귀띔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조식 시간은 '수요 미식회'처럼 음식 비평을 하며 자연스럽게 우아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날씨도 쨍쨍하고 기분 좋은 출장 2일째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상품 회의에는 각 나라에서 온 상품 대표들이 자리를 하며, 향후에 출시될 상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질의응답하는 긴장되는 행사입니다. 전무님은 이들이 원하는 바에 대해서, 그리고 원하지만 들어줄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본사 대표로서 대답을 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시간입니다. 해외영업 담당자인 저도 이런 끊임없는 요구사항을 들을 때마다 난감한 적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 고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리 예측된 질문들과 대답을 출장 자료에 만들어 드렸고, 다행히도 그것을 활용하시어 전무님도 그들의 요구사항에 대해 잘 대처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오후에 방문한 파트너사 공장에서는 낮은 가동률을 어떻게 하면 향상할 수 있을까 질문하셨고, 저는 평소 생각하는 바를 말씀드렸습니다. 내수 상품뿐만 아니라 수출까지도 고려할 수 있게 현지 소싱 능력을 높이면 좋을 것 같고 그를 위해 '구매' '생산'부분이 나서서 검토해주면 좋을 것 같다고, 그동안은 조직 간 '사일로(Silos)' 문제로 잘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씀드리니, 출장 결과 보고서에 넣고 조만간 회의를 여는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이렇게 담당자 선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것을 전무님이 현장에서 직접 보고 나면 실무적으로 좀 더 파워를 가지고 움직여지면서 해결하기 쉬워집니다. 


저녁 만찬까지는 계획 일정 대비 시간이 많이 남아, 인근에 있는 관광지를 들렀다가 가는 것으로 급 계획이 변경되었습니다. 여행사 사이트에서 꼼꼼하게 봤던 곳을 제안드렸고 그곳에 들러 해 질 녘의 노을과 그 나라의 독립을 상징하는 기념탐에서 기념촬영도 했습니다. 법인장님과 주재원 그리고 전무님 저까지 언제 다시 만날 지 모를 조합의 사람들끼리 꼭 사진을 남겨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쭈뼛쭈뼛하시면서 '그럼 그럴까?' 하시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한국 아저씨'들은 늘 그렇듯 쑥스러워하셨지만 내심 좋아하셨던 것 같네요. SNS로 사진을 보내드리니 프로필 사진으로 변경을 하신 것만 봐도 좋아했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만찬에서는 각 나라의 대표들과 소통을 하면서 그들의 소감을 듣고 전무님에게 전달해드렸습니다. 상품 회의를 통해서 그동안 궁금했던 사항을 직접 들을 수 있어서 좋았고 좀 더 이런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다수라고 말씀드리니, 정례화하여 연 2회 실시하는 것을 검토하자고 하셨습니다. 또다시 전무님을 모시고 수행 출장을 올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습니다. 물론 그때는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어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요.


돌아오는 호텔 길에 전무님은 '발마사지'를 받으러 가신다고 하시며, 동행을 권유했습니다만 저는 호텔에 들어가 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수행자로서 모든 일정을 함께해야 했을 수도 있지만, '마사지'를 같이 하는 것은 마치 남자들끼리 일 끝나고 '사우나' 같이 하는 느낌 정도로 느껴져서 그것만은 차마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오버해서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직 남자와 여자로서 느껴지는 거리감 그리고 인식의 차이는 있는 것은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여자로서 수행하는 데에 한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한계라고 지적하는 것이 옳은지 따져봐야겠지만, 저는 후배들에게 이런 상황에서는 'No'라고 또는 'Yes'라고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사고'는 간발의 차이로 발생하고 스스로 불편하다면 'No'를 당당히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 상사 한 명에게 올인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을뿐더러, 순간의 '어색함'을 피하고자 스스로의 '가치관'을 흐트러트릴 필요는 없습니다. 


출장 마지막 날에는 상품 회의의 결과를 랩업하고 향후 출시될 상품에 대해서 품평회를 가졌습니다. 결과 보고서에 담아야 하니 각 국가의 반응도 세심하게 들어보았습니다. 랩업 후 공항에 가기 전까지 2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는데, 법인장도 주재원도 지치셨는지 한 편에서 쉬고 계셨습니다. 저는 전무님과 회의장에 앉아 또 독대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전무님이 회사 생활하면서 어떤 업적을 이루셨는지 본인이 그 분야를 어떻게 개척했는지에 대한 스토리를 2시간에 걸쳐 들어야 했습니다. "내가 과장일 때.... 내가 사업부장일 때..... 말이지...." 본인이 이룬 성과에 대해서 후배들에게 얘기하는 전형적인 꼰대 아저씨의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또 시작이군'이라는 자세로 듣기 시작했는데, 생각해보니 어떻게 전무님까지 올라가게 되었는지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귀 기울여 듣다 보니 전무님이 맡으신 업무를 얼마나 열정적으로 도전적으로 임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나였어도 저렇게 까지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전무님의 방식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지만, 예를 들면 밤을 새워서 일을 하거나, 술을 먹으며 동료애/팀원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는 부분 등 요즘 시대 젊은 사람들(나를 포함하여..)이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것이 옮지 못한 방식인지 옳은 방식인지를 논하기 전에 열정적으로 본인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이렇게 까지 올라왔겠구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해 드려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곧잘 듣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전무님은 좀 더 자세히 본인의 업적에 대해서 격앙되어 신나게 얘기하셨던 것 같습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저는 이왕 듣는 거 재미있게 들어드리자는 마음으로 칭찬도 해드리고, 맞장구도 쳐드리고, 요즘에는 그것을 이렇게 적용해보면 좋을 것다는 새로운 아이디어도 주고받으면서 2시간이 훌쩍 지나갔던 것 같습니다. 전무님은 "내가 A과장을 위해서 2시간이나 무료로 좋은 강좌 해줬네..."라면서 스스로 흐뭇해하셨습니다. '내가 무료로 2시간이나 들어줬네..'라는 생각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감사합니다. 유익한 2시간이었습니다."라는 말로 전무님께 화답해드렸습니다. 돈 드는 것도 아니니까요. 


현지 주재원은 전무님을 잘 케어해줘서 본인이 신경을 덜 쓸 수 있었다며,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한 사람이라도 편하게 해드렸구나 하는 생각에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지 공항 라운지에서는 전무님도 피곤하셨는지 잠시 낮잠을 주무셨고, 그 틈을 타서 저는 출장 결과 보고서에 들어갈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주말에 나와서 출장 결과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전무님 책상 위에 올려놓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꼰대 상사와 의전하기'는 무사히 끝이 났습니다. 다른 외국계 기업이나 타회사는 상사와 출장을 가게 될 경우 의전이라는 역할을 하게 되는지 저는 경험이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 대기업에서나 있는 역할 같기도 합니다. 저도 맨 처음에는 이런 역할을 하며 출장을 가는 것이 너무나도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었고 근시대적이다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이런 의전 활동을 하느라 정작 필요한 업무에 집중을 못 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면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요즘에는 짐을 들어달라든지, 도의에 넘는 의전을 요구한다든지 후진국형 의전은 많이 없어지긴 했습니다. 상사들도 많이 세대교체가 되었고 시대의 변화를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꼰대'들도 스스로 '꼰대'로 평가받을까 봐 많이 두려워합니다. 

조지 오웰은 "모든 세대는 자기 세대가 앞선 세대보다 더 많이 알고 다음 세대보다 더 현명하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이 믿음이 지나치면 '꼰대'가 되기 십상이다


요즘 젊은 직장인들은 '꼰대'들의 말이나 행동을 극혐 하지만, 정작 스스로는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들어주고 내 경우에 맞게 변경하여 적용하려는 '여유'와 '유연성'은 있는지 되묻고 싶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 스스로도 그런 '여유'와 '유연성'보다는 당장의 '못마땅함'에 당장의 '듣기 싫음'에 거부부터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일방적인 언행이 주니어들의 생각이나 아이디어를 담을 준비가 안되어 있다고 느낄 때가 많았고, 그래서 소통이 안되니 차라리 '입 다물자'라고 생각하곤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소통의 문제를 '꼰대'들에게 짊어지게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저부터도 나의 지금의 세대가 저 '꼰대'보다 더 많이 알고 다음 세대보다 더 현명하다고 믿는 그런 '젊은 꼰대'는 아니었나 반성부터 해볼 일입니다.  





전무님과 출장 가면서 크게 걱정했던 것은 없었지만, 역시나 경험해보니 별 큰 일도 아닙니다. 그저 출장길에 '손이 많이 가는'상사 한 명이 동행해서 '오지랖'을 최대한 발휘해서 배려를 더 해줘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일 뿐입니다. 친구 중에도 편하지 않은 친구가 있고 형제자매 중에서도 나와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이 있지요. 그 사람들과 동행을 할 때에도 우리는 기분을 맞춰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사회적 동물'로서 활동하려는 기재를 발휘합니다. 높은 상사, 우리가 꼰대라고 여기는 사람과 출장을 가는 것도 그저 '사회적 동물'의 인간으로서 역할을 다하면 됩니다. 그렇게 짜증낼 일도, 힘겨워할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나를 평가하고 나의 직장생활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꼰대라면 내 편으로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그녀)와 타협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실무자로서 잘 안 되는 일을 그(그녀)의 힘과 지위를 이용해 해결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그녀)에게서 배울 점만 쏙쏙 흡수하는 것도 나의 회사 생활을 위해 나쁜 것도 아니지요. 그리고 내가 더 높이 높이 올라가 나의 방식대로 '꼰대'없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면 될 일입니다. '여유'와 '유연성'으로 '꼰대'들도 당신의 편으로 만드십시오. 다만 스스로의 '가치관'을 지키는 당당함을 유지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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